마르케 -> 풀리아
이른 새벽 , 서둘러 캠핑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분주히 짐을 정리했다. 다음 목적지에 도착기 위해선 남쪽으로 5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구글 맵은 5시간을 추정했지만 초행길에 익숙지 않은 캠핑카 운전이 더해졌으니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은 분명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캠핑장은 기계로 머문 시간만큼 결제를 하고 나가면 된다. 간단했다. 그런데 결제가 끝난 출입카드를 출입구 기계에 넣던 남편이 당황했다. 카드가 자동으로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좀처럼 카드가 들어가지 않았다. 더 깊게 넣어야 하나? 무리하게 집어넣은 카드가 결국은 카드 구멍에 깊숙이 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내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야?”
“여보.. 혹시 집게 있어? 카드가... 끼여서… 안 빠져…”
순간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카드가 껴서 캠핑장에 갇히고 우리 때문에 다른 차들도 오가지 못하고 모두의 여행 일정이 꼬여버리고 끼여버린 카드 때문에 기계를 수리해야 해서 우리의 여행은 꼬이다 못해 망해버리는… 겨우 여행 이틀 차에… 나의 망상 풍선을 더욱 부풀리려는 듯 반려견과 새벽 산책을 하던 할머니가 다가와 걱정 한 스푼 추가한다.
“저번에도 어떤 캠핑카도 이런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쯧쯧..”
새벽 낚시를 마치고 캠핑장으로 돌아오던 할아버지도 다가와 한 스푼 더했다.
“카드가 끼어버렸다고?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저기 길 건너 젤라토 집에서 해결해주곤 했어. 저 젤라토 집이 문을 열면 도와달라고 해 봐.”
“젤라토 집은 언제 문을 열어요?”
“9시? 10시 전에는 열 거야.”
현 시각 06:00.
앞으로 세 시간,
심지어 그때 해결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남편은 애꿎은 기계에 집게만 하염없이 쑤셨다.
바로 그때, 한 캠핑카 안에서 아저씨 한분이 나왔다. 그리고 작은 집게를 들고 진땀을 빼고 있는 남편에게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차를… 더 붙여.
“네?”
“주차 바에 닿을 정도로 차를 더 붙여.”
남편은 홀린 듯 캠핑카에 올라 시동을 걸고 차를 앞으로 움직였다. 딱 한 걸음, 딱 그만큼, 아주 조금 차가 이동했을 뿐인데 주차 바가 홀린 듯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멜롱, 혀를 내밀듯 꽉 끼여버렸던 출입카드가 날름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의 부풀대로 부풀려져 있던 걱정 풍선들이 연달아 터져 나갔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풉,
우린 실성한 듯 웃었다.
“이게 뭐야! 우리 완전 바보 멍청이 었어!!”
딱, 한 발짝 앞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문은 간단하고 단순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여행 내내 역경을 만났다.
가스버너가 화염에 휩싸여 남편의 속눈썹과 그나마 없던 팔의 털들이 죄다 태워버리고, 남편이 차 키를 주머니에 넣은 채 바다에 입수해버려 센서를 고장 내 버리고, 나는 굳이 맥주를 휴대폰과 나눠마셔서 먹통을 만들어 버리더니 험준한 산길에서 길을 잃고 급기야 내비게이션도 잡히지 않는 고립 직전의 아찔한 순간을 만나기도 했다. 그 순간마다 일어나지 않은 그다음을 상상하며 미리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모든 고난은 예상보다 허무하게 해결됐다. 우린 수많은 역경을 거치며 깨달았다.
고난은 걱정이 민망할 정도로 쉬이 해결되며,
환희는 예상치 못한 순간 아주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내 잊었다. 그리고 또다시 걱정하고 환호하고 깨닫고 또 잊음을 반복했다. 어쩌면, 이내 잊어버렸기 때문에 모험이 지속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경은 잊혔지만 희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이 나고서도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행 동안 주차해 놓았던 차는 누가 박고 도망갔는지 범퍼가 내려앉아 있었고 심정지가 와서 겨우 위기를 넣긴 아버지의 소식을 남편은 뒤늦게 접했다. 며칠이 지나 아들이 호흡 곤란이 와서 우린 새벽의 응급실로 내달렸고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의 관계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급기야 빨래가 넘처나는 이 여름에 세탁기 마저 퍼져버렸다.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연달아 일이 터졌다. 우리 부부는 요즘 우리의 운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의기소침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인 것일까? 좀처럼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남편도 종종 생각에 잠긴 듯 앉아있었다. 하루는 넷플릭스로 재생한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근심 어리게 바라보았다.
“심각하네, 티는 안내지만 저 사람도 자꾸 일이 꼬이니 고민이 많을 테지. 그런데 무슨 영화를 저리도 심각하게 보는 거야?”
영화를 다 보고 차인표처럼 분노의 양치질을 마친 남편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가 영화, 차인표를 봤거든, 차인표가 똥을 만져서 씻으러 들어간 건물이 무너져, 그런데 샤워를 하던 중이어서 나체로 갇힌 거야. 그런데 그 와중에 구출이 돼도 변태로 오해받을 상황이 생겨. 그래서 똥 만지면 운이 좋다는데 이게 뭐냐고 괴로워하는데, 마지막에 깨달아.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았던 거야. 건물이 무너졌는데 죽지 않고 산 거잖아. 난 요즘 우리에게 불운이 연달아 닥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운이 좋았던 거야.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너무나 잘 해결되었던 거야. 아버지는 사셨고 이안이는 큰 문제가 없었잖아. 차는 쉽게 고쳤고 말이야. 여행 중에도 그랬어. 바다에 빠진 차키는 고쳤고 맥주가 들어간 너의 휴대폰도 아무 문제없었잖아. 그런데 이 일들이 정말 큰 문제가 되어 버렸다면 우린 무너졌을 거야. 모두 별 탈없이 지나갔잖아.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엄청 운이 좋았던 거야. “
나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일어난 일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 자체가 불운으로 여겨졌지만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큰 일 날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캠핑장에 갇혔던 순간을 떠올렸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긴 거야.’ 원망하던 그때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던 방법도 기억해 냈다.
딱 한 발짝만 앞으로.
나쁜 운에 갇혀있는 듯한 지금을 벗어나는 주문도 같다. 딱 한 발짝 앞으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한 발짝 앞으로 생각을 이동시킨다.
그렇게 운이 좋은 방향으로 내딛는다.
written by iandos
[캠핑카타고 이탈리아 15박 16일] ep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