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TESORO MIO, 나의 보물"
10살 이안과 6살 이도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한국 어린이입니다. 가족과 한국말을 하고 친구들과는 이탈리아말을 합니다. 두 아이의 한국말 표현에는 종종 예상치 못한 특별함이 담겨있습니다. 처음엔 아이가 특별하고, 저의 육아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하면 특별하던 그 말들이 이탈리아말로 바뀌면 지극히 평범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특별함은 이탈리아말이 미묘하게 한국말에 스며들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어떤 말들이었을까요? 저는 앞으로 아이들의 한국말속에 스며든 이탈리아말을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이탈리안 레시피> 1화
: "TESORO MIO, 나의 보물"
한국에서의 두 달 반의 휴가를 보내고 로마에 도착한 다음날, 곧장 아이들과 단골 바에 갔다. 집에서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야외 바이다. 여름이면 하루 걸러 아이들과 이곳에 온다. 이안이는 시칠리아 레몬이 들어간 레모네이드, 탄산을 못 먹는 이도는 배주스를, 나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보통은 잘게 으스러진 얼음이 수북하게 올려진 이곳의 시그니처 모히토를 주문한다. 가이드가 업인 남편은 여름엔 항상 바쁘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아이들을 담당하며 불가능할 것 같은 술 한잔 마시는 외출이 이곳 덕분에 여름날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해 질 녘 북적이는 소음 속에서 아이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 날도 이곳에 왔다. 그런데 아뿔싸! 계산을 할 때가 되어서야 집에 지갑을 두고 온 것을 안 것이다. 당황하는 나에게 바텐더가 내일 와서 계산해도 돼.라고 웃으며 말했다. 내일 휴가로 한국에 가.라고 답하자, 그럼 돌아와서 계산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우리 되게 길게 가... 두 달 넘게... 그러자 그가 웃으며 응수했다. 로마에 다시 안 돌아올 거야? 아니잖아. 우리도 항상 여기에 있을 거고. 너희는 돌아올 거고, 뭐가 문제야?
그렇게 두 달 반 만에 외상값을 갚았다. 야외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다들 찐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왔는지 빛나는 구릿빛이다. 늦여름의 이탈리아 초저녁 공기는 행복이 응축되어 있다. 야외 좌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무 채색 옷을 입고 있지 않다. 모두가 각자의 퍼스널 컬러를 자랑하듯 알록달록이다. 알록달록한 색들 사이에선 그 어떤 색도 도드라지지 않는다. 모든 색이 조화롭다.
이번 여름 이안이는 10살이 되었다. 10살의 이안에게 어울리는 질문을 해 보았다.
여기 앉은 남자들 중에 누가 제일 잘 생겼어?
문득, 이안이가 어떤 남자를 보았을 때 멋지고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고민에 잠긴 이안의 대답을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난..."
두근두근
난 내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아.
네?... 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다.
저 꽃무늬 셔츠의 청년도 와인을 마시는 저 신사도 센스 넘치는 저 형도 아니고 너? 바로 너?
와... 당신은 진정 저의 답안에 없는 남자였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짜로? 여기에 있는 남자들 중에서 네가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난 못생겼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할수록 '하지만'이 붙지. '나는 못생겼어, 하지만 게임을 잘해.' '나는 책을 안 읽어, 하지만 똑똑해.' 이렇게 말이야. 나의 칭찬을 한 개씩 꼭 해.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래, 엄마. 과. 학. 적. 으.로.
"그게 왜 과학적이야?"
"과. 학. 적. 으.로. 생각해 봐. '나는 일본어는 못하지만, 한국어를 잘해.' 봐봐. 친구들이 엄마를 놀려. '민주는 게임 못한대요~ 숙제도 까먹어대요~' 뭐 이렇게 말해. 그러면 엄마는 '아니야~ 내가 숙제는 까먹어도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 바로 독서야. 독서.' 친구들이 놀리면, 뭐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내가) 못해도 (나에게) 잘한다고 말해주는 꼭 사람이 있어. 나는 농구를 못하는데 친구들은 농구를 잘한다네? 그럼 나도 나에게 농구를 잘한다고 말해줘야지. 아무튼,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칭찬을 한 번은 꼭 한 번은 해봤을 거야. 누. 구. 나.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사람은 뭐든 한 가지는 잘하는 게 있고, 누구나 한 번은 자기 칭찬을 한다는 거야. 과. 학. 적. 으.로."
"그럼, 넌 네가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너에게 못생겼다고 한다면, 네가 느끼는 감정은 뭐야?"
"내가 느끼는 감정? 그냥 멍하지. 어,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하지. 그냥 무시해."
"난 잘생겼는데 왜 못생겼다고 하지? 이런 생각인 거야?"
"아니, '아~~~ 쟤 눈은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런 거지."
한국에서 머무는 7,8월 사이에 이안과 나의 대화를 담은 모자문답집의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자가 출판으로 세상에 나온 책임에도 큰 사랑을 받은 1권에 이어 2권도 너무나 감사하게 많은 분들이 애정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의 도움으로 서울과 대구에서 북토크를 가졌다. 대구 북토크 중에 있었던 일이다.
이안과 함께한 Q&A 시간에 진행자를 맡았던 포포포 매거진의 정유미 대표가 물었다.
"이안이는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안이 답했다.
"지금 제 모습 그대로, 큰 거?
그리고 병이 안 걸렸으면 좋겠고요."
그 말이 '나는 커서 건강한 내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로 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은 나’ 라든가, ‘나는 어른이 되면 큰 내가 되고 싶어요.’ 라던지, 한국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을 아이가 할 때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 아이로 키웠나요?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진짜 솔직하게 나는 내가 잘 키운 건 줄 알았다. 아이가 특별한 사고를 타고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아이는 지극히 평범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 키우는 엄마도 아니었다. 최근 부쩍 살이 찐 아이에게 세상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라는 말에 서슴없었고, 이탈리아에서 살이 쪄서 외국 살찐 사람 몸매라는 말도 거침없었다. 그럼에도 이안이는 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어쩌면 이안이가 10살의 삶을 살며 만난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TESORO(보물)이라고 불렸기 때문이 아닐까? 이탈리아에선 어린이를 부를 때, "TESORO MIO" (테조로 미오 : 나의 보물) 라고 부른다. 내 아이, 내가 아는 아이, 내가 모르는 아이 모두 동일하다. 보물이 아니면 "AMORE MIO" (아모레 미오 : 내 사랑)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BAR(*이탈리아에선 커피를 마시는 카페도 BAR라고 부른다.)에 가서 아이가 주문을 할 때면 바리스타는 이렇게 아이에게 묻는다. "그래, 아모레 미오, 뭘 줄까?" 한국말로 " 내 사랑, 뭐가 먹고 싶니?"라고. 아이를 혼낼 때도, “아모~레 미오!!!! ( 내사랑!!!)”. 너무나 낯간지럽지만, 이탈리아에선 어디 하나 간지럽지 않다. 미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니~ 베이비~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내 보물, 내 사랑 (물론, 이탈리아 말로) 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세상 어른들의 보물이고 사랑이었다. 보물이라 부르는 어른이 되는 일도 보물인 어린이가 되는 일도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하루하루 쌓였다. 어린이로 사는 생의 시절 대부분을 만나는 대다수의 어른들에게서 보물과 사랑으로 불려진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흘러 넘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보물이라 불려지는 시간의 레이어가 10년이 넘게 쌓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거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나? 완전히 과. 학. 적. 으.로.
언젠가 이안이에게 물었다.
어린이는 뭐야?
이안이가 답했다.
착한 사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른은 뭐야?
이안이가 답했다.
아주 착한 사람.
소년을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로 키우는 것은 그를 보물로 다듬어주는 수많은 ‘아주 착한 사람’들의 말이다.
어린이를 ‘보물’로 만드는 것도 어른을 ‘아주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어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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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모자문답집
: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한국에서 태어난 엄마가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