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ANCORA 5 MINUTI, 5분이나"
10살 이안과 6살 이도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한국 어린이입니다. 가족과 한국말을 하고 친구들과는 이탈리아말을 합니다. 두 아이의 한국말 표현에는 예상치 못한 특별함이 담겨있습니다. 처음엔 아이가 특별하고, 저의 육아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하면 특별하던 그 말들이 이탈리아말로 바뀌면 지극히 평범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특별함은 이탈리아말이 미묘하게 한국말에 스며들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어떤 말들이었을까요? 저는 앞으로 아이들의 한국말속에 스며든 이탈리아말을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이탈리안 레시피> 4화
"ANCORA 5 MINUTI, 5분이나"
기차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티켓을 구입한다. 치익치익 일인 당 하나씩 티켓이 인쇄되어 나온다. 괜히 왕복으로 산다고 했네. 아이 둘과 나까지 총 6장이 인쇄되어 나오는 시간이 마치 억 겹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겠군. 이 나라는 티켓발권기계까지 느리네. 발을 동동 굴리며 아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티켓 받으면 바로 뛰엇! 5번 플랫폼이야. 알겠지?"
옆에서 그 모습을 삐딱하게 지쳐보던 이탈리아 아저씨가 한 마디 한다. 늘어진 반 팔 티셔츠, 겨드랑이에 꽂은 종이 신문. 그는 아마도 우리가 오기 전 티켓 부스 할아버지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일 이야기해도 무관한, 어쩌면 어제도 나눴을지도 모르는, 매일 닮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한량 아저씨가 손을 휘휘 저으며 느리게 인쇄되어 나오는 티켓을 주시하며 나에게 하는 말인 듯 혼잣말인 듯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던진다.
Calmati,
mancano ancora 5 minuti.
진정해,
아직도 5분이나 남았어.
그가 허공에 저었던 것은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마법의 지팡이였을까? 그가 외친 것은 마법의 주문이었던 걸까? 동동거리던 내 발이 한순간에 멈췄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박동도 잔잔해졌다. 홀린 듯 티켓을 받아. 5번 플랫폼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시간이 우리에게만 느리게 흘렀던 것은 아닐 텐데.... 플랫폼에 선 우리에겐 아직도 '2분이나' 남았다. 곧이어 기차가 보였다. 마치 아주 여유 있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는 해변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5분밖에'의 나라에서 태어나 '5분이나'의 나라에서 살아가며 나는 수없이 마법의 순간을 만난다.
"이 나라가 느린 것은 진짜 시간이 느리게 흘러서인가?"의 착각 속으로 수없이 빠져든다.
2016년, 4살의 이안이와 함께 슈퍼마켓
슈퍼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이가 계산대에서 서서 따라오질 않는다. 이안! 뭐 해! 빨리 따라와! 그때 누가 날 불렀다. 계산대의 직원이었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돈만내고 물건은 안 담은 거다.
"이안, 고마워. 이안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엄마는 언제나 급해.
급하면 자꾸 놓치지.
'빨리, 빨리.' 속에서 우린 무엇을 놓쳤을까?
2019년 10월 초등학교 1학년 이안이의 첫 소풍날,
소풍 장소는 로마 근교, 거리가 있어 아침 7시 반까지 등교해야 한다. 아직은 깜깜한 새벽 , 6시가 조금 넘었는데 깨우지도 않은 아이가 일어나 쓱, 화장실로 들어간다. 뭐야? 너 설렌 거야? 그럴 만도, 초등학교 첫 소풍이다. 전날 소나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공기가 달라졌다. 춥다. 하늘은 눈부실 만큼 파랗다. 가을이 왔다. 오후면 따뜻해질 테니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다. 학교 정문은 이탈리아 부모들의 수다로 왁자지껄했다. 상기된 아이들. 짝과 손을 잡고 서서 앞 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행복이 표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친구들과 몸으로 놀며 숨넘어갈 듯 웃고 있는 아이를 보니 차가운 공기가 무색하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런데 7시 반 모임 시간에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버스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운전사는 진작에 출발했다는 답만 되풀이.
그러나 그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1시간 반 동안 부모들은 떠들었다. 잠시 추위를 녹이려 바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떠들었다. 한 아빠가 타고 온 전동 킥보드를 엄마들이 돌려 타며 남편들은 비디오를 찍으며 놀렸다. 몇몇 아빠들은 경비 아저씨와 소풍 버스에 붙일 안내 판을 자기들 등에 붙이며 순서대로 실어 나르자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깔깔 웃었다. 어느 누구도 출근 시간에 발을 동동거리지 않았다. 9시가 다 되어서 버스가 도착했다.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 모두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도착한 버스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파리가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버스가 파리에서 출발했구먼, 거기에서 출발이면 빨리 도착했네.” 하고 또 웃었다. “역시 여행의 백미는 로마지.” 하고 또 웃었다. 아이들이 버스에 오르고 출발하자 모두는 크게 소리쳐 인사하며 출근길에 올랐다. 이탈리아 회사에서는 왜 출근이 늦었냐? 물으면 “애 소풍 버스가 늦게 왔어.”라고 답하고 “에헤이~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나보다. 버스에 오른 아이들이 짙게 선팅 된 버스 차창에 얼굴을 밀착시키고 끝도 없이 부모에게 키스를 날렸다. 버스가 출발하자 손을 흔들던 부모들이 하나 둘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오전에 갔다 오후에 돌아올 아이들인데 부모 없이 떠나는 아이들이 그저 대견하고 뭉클했다. 눈을 마주친 우린 민망해하며 그러나 너무나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서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누구도 버스가 왜 늦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첫 소풍날을 놓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버스를 보내고 발걸음을 옮겨 우체국으로 향했다. 소풍 보내고 우체국 가서 일 마치고 오전에 일을 다 끝내야지 했는데, 9시가 훌쩍 넘어 우제국에 도착하니 내 번호표는 220번. 전광판엔 150번이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 오전도 이렇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흘러가는구나. 우체국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20명 남짓. 나머지 50명은 당최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옆에 앉은 할머니의 번호는 210번이다. 얼마나 우아하게 옷을 입으셨는지 대놓고 그녀의 아름다운 블라우스와 카디건을 바라보았다. 눈이 침침하신지 전광판 번호가 하나 올라갈 때마다 물어보셔서 기다리는 것 밖이 할 일도 없으니 번호가 바뀔 때마다 읽어드렸다. 180번 정도 되었을 때다.
“난 늙은이지, 나이 든 사람의 말이야. 그냥 흘려들어. 내 나이 50,60 때까지도 이탈리아는 너무 좋았어. 느리고.. 따뜻했지. 그런데 지금의 로마를 봐. 엉망진창이야. 너무... 너무... 빨라. 매 시간, 매 분, 뭐가 많아. 계속 바뀌고 너무 빨라. 늙은이의 말이야. 그런데 너무 빨라. 우리 나이 든 사람들에겐 너무 힘들어. 그냥 들어. 늙은이의 말이야.”
그 빨라졌다는 것이 말이죠. 여전히 얼마나 느린지 아십니까? 한국은... 말이죠.... 하고 말하려다 멈추고 "그래요, 이탈리아도 참 많이 변했어요." 하고 답했다. 전광판은 어느덧 200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느린 이탈리아 사람들이 여름휴가는 반년 전에 이미 예약완료, 생일 파티는 한 달 전부터 초대장을 보낸다. 세상 모두가 느리다고 하는 로마의 시간은 우리 눈에만 늦어 보이는 거지. 빨라야 할 것이 세상의 순위와 다른 거다. 버스가 늦었지만 그 누구도 왜 늦었는지 묻지 않는다. 학교 단톡방 그 어디에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종일 이번 주 생일인 아이의 생일 선물 이야기만 잔뜩 펼쳐지고, 생일 주인공인 아이가 학교에 간식을 가져올 건데 반 친구 중 누가 초콜릿 알레르기가 있진 않은지가 더 중요한 화두이다.
모두가 이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야 라고 말하는데 이탈리아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초콜릿 간식 해결하고, 여름휴가부터 정하고, 생일 파티가 더 중요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뭐라 해도 이들이 생각하는 생의 우선순위는 흔들림이 없을 것 같다. 이런 나라에 자라서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우리 애들이 적응이나 할까? 걱정이 앞서던 어미는 이른 아침 소풍 버스를 기다리던 아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부족하고 느렸던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뭐, 그때도 지금의 이탈리아보다 빨랐던 것 같지만..) 그 시절을 목놓아 응답하라!!!! 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그리운 것을 보면, 아이들이 누리는 이 느림이 얼마나 눈부신 선물임은 알겠다.
주말이 되어 외출을 하려는데 아이들이 굳이 가지고 나갈 장난감을 골라야 한단다. 짜증을 냈더니 한마디 한다.
엄마! 엄마는 기다릴 줄을 몰라?
나참, 로마의 시간 안에서 속도를 맞추기엔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머네.
시간은 흘러 2023년,
이안은 5학년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초등학교는 5학년이 마지막 학년이다. 그리고 10월 소풍날이 돌아왔다. 소풍장소는 2019년의 로마근교 그대로. 모임시간도 7시 30분 그대로. 이안은 이번에도 6시에 스스로 일어났다. 달라진 건, 도시락으로 싼 파니니가 2개에서 3개로 늘었다는 것뿐이다. 버스는 또 늦는다. 이번엔 운전사가 전화도 받지 않는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연락이 닿은 버스 운전사가 오고 있다는 곳은 학교와 30분이나 떨어진 곳이다. 결국 두 시간이 늦은, 9시 30분이 되어서야 버스가 도착했다. 학교 모퉁이를 돌아 버스가 보이기 시작하자 기다리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함께 기다리던 30명이 넘던 부모들은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버스가 도착했을 땐 10명 남짓이 남았다. 첫 소풍 땐 아이들이 버스에 오르던 모습만으로도 울던 부모들이 이제 5학년이 되니 덤덤하다. 마지막까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일라리아의 엄마가 말했다.
"내가 신혼여행을 갈 때 말이야. 여행 날짜가 다가오는데 여행사의 실수로 일정이 꼬였어. 결국 우린 예정된 날에 출발을 못하고 일주일이나 일정이 미뤄졌지. 짜증도 나고 왜 하필 우리가 이렇게 운이 나쁜가? 했다고. 그런데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장소에 해일이 덮쳤어. 피해가 심했지. 그때부터 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왜 이렇게 운이 나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 지금 그 일 덕분에 더 큰 불행을 피한 거야. 오늘도 버스가 2시간이나 늦었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어떤 불행을 피한 거야. 그 불행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나 감사한 거지. 결국은 우리에게 행운인 거야.
그리고 소풍 두 시간 늦는 게
딱히 큰 일도 아니잖아?
5년 전에도, 오늘도, 그 누구도 버스가 늦은 이유를 모른다. 기다리다 버스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출근했던 엄마가 단톡방에 짧게 글을 남겼다. "대체 왜 늦은 거야?" 다른 한 엄마가 짧게 답을 남겼다. "누가 알겠어?"
끝.
4시 반에 돌아오기로 예정되었던 아이들은 6시 반에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왔다.
오늘도 하나 배운다.
소풍 버스가 2시간 늦으면,
소풍 가서 2시간 더 놀면 된다.
어느 날, 오빠와 킥보드를 타던 이도가 울음이 터졌다. 이도는 오빠보다 더 빨리 달리고 싶다. 내가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다. 슬슬 화가 폭발하려던 찰나, "엄마, 내가 이도와 이야기해 볼게." 이안이가 막아섰다.
이도, 오빠 말 잘 들어.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킥보드 재미있지?
재미있는 게 중요해.
이도, 오빠가 천천히 갈게.
자, 이제 같이 갈까?"
두 시간 늦은 버스가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소풍이다.
에라 모르겠다.
세상 모두가 느리다 해도 이탈리아 너는, 네 갈길을 가라.
나도 이젠, 이 속도가 좋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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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모자문답집
: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한국에서 태어난 엄마가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