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나는 물리학에 심취해 있었다. 고전 역학, 전자기학 등의 문제를 푸는 것은 나에게 어려움을 극복한 후의 성취감을 주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성취감으로만 임했다면 물리공부를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학의 진짜 매력은 현실 세계의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데 있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어떤 시간에 어디에 위치하며, 결국 어떻게 될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이 문장을 수학적 용어로 기술하는데, 결국 그 수식들은 우리에게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준다.
초기의 몇 개의 데이터
사과가 지상 위 몇 미터 높이에 있는지
중력가속도가 얼마인지
공기 저항에 관한 상수는 얼마인지
만 알고 있다면, 사과의 이동 궤적을 실제와 비슷하게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이렇게 정확히 시뮬레이션 하게 되기까지 물리학자들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는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물리학을 깊이 파고들수록 현실세계와 멀어지는 느낌 때문이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없다. 그래서 결국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개념하에 있다.’
‘원자 주위의 전자는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쿼크의 존재, 블랙홀, 초끈이론…’
계속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의 대답은 ‘No’ 였다. 나는 연구하기를 좋아하지만, 현실에 발붙인 연구를 하고싶었다. 그렇게 물리학에 대해 관심이 멀어진 후 거의 10년이 흘렀다. 그러다 최근 마크 뷰캐넌의 책 ‘Forcast’를 보았다.
와우 ! 물리학의 큰 흐름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들었으며,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 복잡계 물리학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인 ‘경제학’에 복잡계 물리학을 적용해본다.
책에는 날카로운 통찰들이 많이 녹아 있었다. 이 책을 두고두고 여러 번 보면서 관련 논문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다 알기 어려울 뿐더러 방대한 양의 참고 문헌이 실려 있어 직접 데이터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봐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겠다.
나누고 싶은 좋은 내용이 많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써 보겠다.
저자는 ‘현대의 주류 경제학’이라 불리는 학문 집단의 이론으로 시장의 특성이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1987년 10월 19일 블랙먼데이
2007년 8월 1일 퀀트 붕괴 (quant meltdown) 사건
2008년 금융위기
2010년 5월 6일 미국 주식 시장에서의 급격한 주가 폭락 (flash crash)
주류 경제학은 특히 이렇게 급격하고 폭발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것들을 예외라고 치부한다.
(2008년과 같은) 주목할 만하게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전 세계적인 “보이지 않는 손”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율과 금리, 가격, 임금 상승률을 창출했다.(content 1)
-앨런 그리스펀 (전 FRB 의장)
그리스펀 전 의장의 말에서 ‘안정된’ 이라는 말이 돋보인다. 주식 혹은 다른 여러 투자 자산의 가격 움직임을 눈으로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은 이 ‘안정됨’이 시장에 정말 존재 하는지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짧지만 내 경험으로도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은 있어도 완전한 ‘안정된’ 상태는 본 적이 별로 없다. 특히나 가끔 한 번씩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발적인 가격의 움직임은 ‘드물게 발생하는 예외’라고 말하기엔 별로 드물지 않아보인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코스피, 코스닥 지수만 관찰하여도 이를 바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큰 폭으로 움직이는 모습들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드물지 않다면 ‘예외’라고 말하긴 어렵고, 또한 그 ‘예외’라고 말하는 것이 발생했을 때 너무나 큰 충격과 피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또 다른 시장의 특성 중에 ‘멱함수 분포 법칙’이 있다. 이는 지진 예측과 관련하여 구텐베르크-리히터가 발견한 법칙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멱함수 분포의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가격의 큰 변동은 작은 변동보다 더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 초반 프랑스 수학자 망델브로(Benoit Mandelbrot)가 목화 시장 가격을 연구하면서 처음 발견했고, 이후 1999년 보스턴 대학교 해리 유진 스탠리 연구팀(Harry Eugene Stanley et al.)이 금융 지수 및 개별 주식 시장에서 그 존재를 확인했다.
명백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현상에도 경제학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물론 주류 경제학에서 이에 대한 후속 연구를 안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저런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반드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인용한 여러 사람들의 말 중에 경제학의 현실을 알리는 문장이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말을 연구할 때 진짜 말을 보러 가지 않는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만약 말이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content 2)
-일리 데번스(Ely Devons)
내가 말이라고 가정하면, 실제 현실에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마크 뷰캐넌이 소개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현실에 대한 가정은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때 ‘합리적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한다. 합리적 기대 이론에서는 모든 경제주체가 자신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선택을 조정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들어오는(Input) 정보는 같을지 몰라도, 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에는 개인차가 분명 존재한다. 또한 사람들끼리 서로 상호작용하여 의견이 동조화 되거나 달라질 수 있음을 무시한다. 설사 어떠한 정보에 대한 판단과 대응이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합리적’이지 않아보여도 사람들은 가끔 그런 선택들을 한다. 또, 같은 정보를 들은 사람 중에 경제학자들과 똑같이 생각하여 대응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지금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 주장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심리가 복잡한 것은 분명한데, 경제학에서는 이를 피해가기 위해 ‘합리적 기대’라는 프레임으로 어물쩡 넘어가려한다. 이렇게 넘어가서 경제학자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뷰캐넌은 경제학자들이 이를 통해 경제학 이론의 수학적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말한다. 집 모양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모래를 재료로 쓰고 있는 격이다.
또 한 가지 경제학의 중요한 가정 중에는 ‘평형(Equilibrium)’이란 개념이 있다. 현대 경제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이론들;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대한 평형
애로와 드브뢰의 파레토 최적 (Pareto optimal) : 자원 이용의 효율성
유진 파마의 효율적 시장 가설 (EMH) : 정보 이용의 효율성
레드너와 루카스의 합리적 기대 평형 상태 (rational expectations equilibrium) : 위 두 개를 연결 해주는 이론
에는 ‘평형’의 가정이 녹아있다. 이것들은 ‘평형’이라는 관점을 유지한 상태로 현실을 해석하려한다. 심지어 이러한 가정이 빠져 있을 시에는 ‘올바른 경제학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책에는 위의 이론들이 설명못하는 현실적 근거를 몇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 가격 변동성의 멱함수 분포,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시장 등)
날씨에 비유한다면, 경제학자들은 맑은 날만 연구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시장에도 분명 폭풍이 몰아친다. 그런 궂은 시장의 날씨를 해석하려면, 맑은 날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부족한데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폭풍이나 회오리가 어디있냐고 대응한다.
거품 경제에 대한 유진 파마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심지어 거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 단어들은 점점 대중적이 되었다. 나는 이 단어들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예상 가능한 현실이어야 한다. 나는 이 중 어떤 것도 특별히 예상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content 3)
나는 ‘연구결과가 현실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냥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잘못된 이론을 바로잡으려면 처음했던 ‘가정’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경제학계에서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이다. 경제학 전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만약 저자가 전하는 경제학계의 모습이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된다.
저자는 대기의 상태 혹은 날씨에 시장을 많이 비유하는데, 저러한 폭발적인 움직임은 폭풍이나 토네이도에 비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무릎을 탁 치는 비유다. 폭풍이나 토네이도는 우리에게 ‘드물게 일어나지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로 인식된다. 컴퓨터를 통한 계산 능력 향상과 시뮬레이션의 진보가 이런 인식을 가능케 해 주었고, 어느정도 그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와 시장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본다.
‘평형’의 가정을 떨쳐버리고 시장을 외부적 변화요인이 항상 존재하는 하나의 ‘탈평형계’로 인식해보자. 언제든 새로운 거래자들이 유입될수도 있고, 나갈수도 있으며, 각 거래자들은 시장에 매수 혹은 매도 요청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가격이 오르는 자산을 보고 ‘어 ! 오른다 !’하며 따라사기도 하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자산을 싼 값에 미리 선점하려 하기도 한다.
이러한 계(System)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숲을 보듯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차트를 보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면, 전체를 바라보고 있을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투자자 개인의 특성이 어떤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집단적인 움직임,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말하면 ‘파벌싸움’이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하다.
한편, 멱함수 법칙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장은 탈평형계 중에서도 ‘자기유사성(self similarity)’을 가지고 임계상태를 스스로 조직하는 계(self-organizing system)로 추정된다. 시장이 왜 이런 모습인지는 아직 연구된 바가 없는 듯 하다.
일단 이러한 임계상태에서는 언제든 ‘파벌싸움이’ 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단 한 명의 작은 매수 혹은 매도 주문으로도 그것이 연쇄 도미노(양의 되먹임, positive feedback)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든 폭풍이 일어날 수 있고, 확률이 낮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일상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된다.
시장의 가격 변동에서 나타나는 멱함수 분포 그래프 모양은 이 설명에 힘을 실어준다. 정규분포와는 다르게 극단적인 일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은 그래프 상에서 ‘두툼한 꼬리(heavy tail)’로 나타난다. 수학적인 특성상 멱함수 분포가 정규분포보다 더 느리게 감소하며 이러한 두툼한 꼬리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 진짜 이런 모습인지는 사실 확신할 길이 없지만, 현재까지의 증거들로 보았을때는 충분히 의미있는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p.s) 복잡계 과학에서 말하는 임계상태, 멱함수 분포, 프랙탈, self-organizing system 등에 대해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함을 스스로 느낍니다. 위 단락들은 이에 대한 저의 이해를 바탕으로 쓴 내용이니 충분히 틀릴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기존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복잡계 물리학은 그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전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과거에 발생하였던 극적인 격변들 몇 가지에 대한 설명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 설명들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은 ‘시장의 효율성(market efficiency)’과 ‘시장의 안정성(market stability)’은 반비례 관계라는 것이다.
2007년 8월 6~9일에 있었던 퀀트 붕괴 사건 (헤지펀드들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손실)
-> 헤지펀드들이 서로 비슷한 전략을 사용함
-> 수익률 감소 -> 투자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감소된 수익률을 만회하려) 높은 레버리지 사용 -> 시장에 과도한 유동성이 생겨 (과도한 시장 효율성) 시장 불안정성(instability) 증가 (A)
-> 한 펀드가 현금 마련 위해 일상적인 매도 진행 (B)
-> 주식 가격의 일시적 하락
-> 높은 레버리지로 거래하던 다른 펀드들에게 연쇄적인 마진 콜을 발생시킴 (C)
-> 주식 가격의 폭락
2010년 5월 6일에 일어났던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 초단타매매(High Frequency Trading) 알고리즘은 속도가 경쟁력을 의미함
-> 특정 전략이나 패턴을 많은 알고리즘이 경쟁적인 속도로 사용하므로 붐빈다
-> 시장의 과도한 효율성으로 시장 불안정성 증가 (A)
-> 특정 알고리즘의 일상적인 매수나 매도 진행 (B)
-> 자산 가격의 급격한 변동 촉발
-> 알고리즘들의 연쇄반응 일어남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보자면, 알고리즘의 손실제한 주문이나 가격 돌파시 매수 주문 등) (C)
-> 수 밀리 초 동안의 급격한 가격 움직임 (Fracture 혹은 Spike) 형성
복잡계 과학의 이러한 설명들(content 4, 5)은 분명 논리적으로도 쉽게 이해된다. (A), (B), (C)라고 표시 된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A) 임계상태 형성
(B) 탈평형계에서 항상 발생하는 일상적인 원인
(C) 양성 되먹임 (positive feedback)
이 단계들이 임계상태에서 일어나는 격변의 주요 뼈대를 형성한다.
책을 읽으면서 시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또한 이전에 관심이 있었던 물리학이 나타나서 더 반갑기도 했다. 단순한 모래더미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여러 본질을 파헤치려 시도하는 물리학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시장은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이 구성한다’라고만 생각하면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설명을 내놓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주류경제학에서처럼 ‘개인의 예측불가능한 결정’을 ‘합리적 기대’라는 다른 말로 포장하여 피해가는 것도 옳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복잡계 과학의 설명은 회피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임계상태로 형성된 탈평형계에서의 급격한 연쇄반응은 시장에서 어떠한 타임프레임으로든 발생할 수 있는 폭풍의 본질을 말해준다.
원자 단위의 세계에서 뉴턴역학의 실패가 양자이론을 만들었듯,
맥스웰 전자기학이 상대성 이론의 지평을 여는 단초였듯,
복잡계 물리학이 시장과 경제이론을 새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하는 바이다.
Content 1) 내일의 경제 / 마크 뷰캐넌 / 89p
Content 2) 내일의 경제 / 마크 뷰캐넌 / 203p
Content 3) 내일의 경제 / 마크 뷰캐넌 / 321p
Content 4) 내일의 경제 / 마크 뷰캐넌 / 245-249p
Content 5) 내일의 경제 / 마크 뷰캐넌 / 292-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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