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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방진 백조 Dec 22. 2021

호랑이가 온다

극락이 무엇인가요, 스님

# 1


커다란 나뭇가지와 넝쿨이 엉클어진 캄캄한 수풀 속을 두 여자가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뺨 위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시야를 가린다.

흘끗 뒤돌아보니 '까만 얼룩'은 펄쩍펄쩍 날 듯이 달려오며 우리를 쫒고 있다.

으슬한 숲 속을 채우는 두 여자의 가쁜 숨소리.


꼬마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앞서 뛰고 있는 사람은 엄마.

여자아이는 나다.


축축한 진흙 비탈 위를 딛자,

. 미끄덩. '주르르르으~으윽'

"아아~악" 엄마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엄마~엄마아~!!"


엄마를 붙잡고 울다가 고개를 처드니,

어느새 우리 앞에 와 떡 하니 서 있는 '까만 얼룩'의 정면 눈과 딱 마주친다.


<호랑이> 다.


"야! 너 뭐야? 왜 따라와!!!"

"나 너네 집에서 살 거야!"

"(어쭈, 말을 하네) 뭐? 너 커서 우리 집에 들어오지도 못해!"


말도 텄겠다. 별로 무서운 애 같지도 않아, 엄마와 나는 천천히 '걸어서' 도망가본다.  

어슬렁~ 어슬렁~ 큰 눈을 껌뻑이며 천천히 '딴짓하며' 따라오는 호랑이.

뒤돌아보며 오지 말라는 눈짓을 줘도 계속 따라온다.    


그 해 88'

대한민국 최초의, 호돌이 마스코트 올림픽이 개최된 그 해.

내 동생은, 뜨겁게 태어났다.


이 호랑이가 내 마음속 첫 번째 호랑이.

사랑하는 실존 호랑이다.

 


# 2


'으. 아. 아. 아아~악!'

낮잠을 자다가 벌떡 깼다.

내 소리에 내가 놀라 깼다.   


창호지 면을 통해 들어와 온돌 바닥을 어루만지고 있는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발꼬락을 꼬물 움직여본다. 몸은 어디 떨어져 나간 곳 없이 멀쩡하다.

'휴우...' 꿈이었다.

꽤 날렵한 몸매의 호랑이가 내 방 창호지를 한 방에 '퍽' 뚫으며 날쌔게 날아 들어와

온몸을 던져 내게 달겨 들었던 것이다.

'휴우... 아찔!' 다시 한번 내 몸의 사지를 움직여본다.


밖에서 사각사각 비질 소리가 들린다.

'아, 이번에도 '아찔!'

전라도의 한 절에서 템플 스테이 중이었다.

아까 전의 송곳 같은 비명 소리가

이 옆, 저 밖에 안 들렸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아찔'해져 왔다.


살짝 문을 열고 동태를 살피다가, 비질을 하던 스님과 딱 마주쳤다.

미소를 드렸더니, 미소로 화답하신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예. (뚱딴지 같이) 저 너무 행복합니다!"

또 한 번의 온화한 미소.  

"그럼 된 거죠."  


이것이 두 번째 호랑이.

산사의 작은 방에서 만난, 그야말로 꿈속의.

꿈속의 호랑이. 몽중호(夢中虎)이다.  




엄마와 나는 문경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얼굴이라도 뵈려면 빨리 오는 게 좋겠다는 삼촌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할머니께 가는 길이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까만 옷을 잔뜩 쑤셔 넣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할머니는 대자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듯했다.


하늘이 어둠의 신에게 손짓하자 곧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마지막 터널을 빠져나오니

양 옆의 새까만 산등성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애마는 완전히 포위당했다.


느닷없이 호랑이 생각들이 난 것은

이 어둠의 시작, 자연의 포위 때문이었다.


저 산, 깊은 까망 안에 호랑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 생각은 세 번째 호랑이로 이어졌다.




# 3


퇴사 후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

법정스님이 짓고 칩거하시던 송광사 불일암으로 향했다.   


불일암을 찾아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삼나무, 편백나무 숲을 지나, 무성한 대나무 숲에 다다랐을 때,

대나무들의 호흡을 한 껏 나눠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화 <와호장룡>의 대숲 결투가 벌어지는 것처럼 대나무 들은,

저 위, 하늘 숲에서 한들한들 우아한 춤을 추고 있었다.   


불일암으로 향하는 대나무 숲길 _ 2017.11


나는, 그곳에서 <호-랑-이>를 본 것 같다.
빼곡한 대나무 사이를 조용히 걸어가는,  

매섭지만 기품 있는, 강하지만 부드러운.

 

내가 불일암에 도착할 때까지,

내 곁, 숲 속 어딘가에 계속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기운은 결코 두려움 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세 번째 호랑이.

신비로운 호랑이. 환영호(幻影虎)이다.


*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스님의 수행 길을 따라 올라

비로소

소박하게 사시던 그곳에 다다랐을 때, 눈물이 나올 뻔했다.

햇살이 비추었고, 작은 암자가 있었다.

텃밭이 있었고, 낡은 의자가 있었다.  


'극락이 무엇인가요, 스님' _ 2017.11


수돗가와 텃밭에게 물었다.

고무신과 의자에게,  

유골을 품고 있는 후박나무에게 물었다.


극락이 무엇인가요, 스님

...


그 대답을 듣고 내려오던 길은 어찌나 황홀하던지.  

어두워지고 있는 숲은 더 고요하고 더 신비로웠다.  

환영호(幻影虎). 여러 마리의 보호를 받으며 내려왔다.


행복했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신 할머님은 현재 나의 시간과 공존 중이시다.




호랑이가 오고 있다  

2022년 임인년 '검은 호랑이'


예측하지 못할 많은 일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 그래 왔다.


이것은 22년 호랑이. 새 시작의 이야기면서,   

극락이 무엇이냐 묻던 불일암 속 나의,

무작정 장밋빛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삶이다.


두렵지만 씩씩하자.

자신 갖지만 겸손하자.  


나는,

당당하게 호랑이를 마주할 것이다.  


                                                         

             


                           

                        할머니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갈 때   

                              귓가에서 흘러나오던 곡

  

♬ 어느 새  / 장필순  

어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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