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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방진 백조 Apr 29. 2022

Lost & Walk (로스트 앤 워크)

런웨이. 뉴웨이 - 플라워웨이. 스카이웨이  


Runway


어깨를 쫙 펴고. 척추를 곧추세운다.

턱을 살짝 당기고. 시선은 정면.

입가에는 밝고 건강한 미소.

걸음걸이는 당당하고 품위 있게.

'That’s My Runway!'

내가 런웨이를 활보하는 방법이다.


약 1.3 km

좋은 음악 5곡 정도의 감상이 허락되는 거리.

양 쪽으로 미끈한 나무들이 쫙 뻗어져 있는,

내가 '마이 런웨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3년여 동안 나의 소중한 출퇴근 길이기도 했다.


사실 그 이상이었다.

내 지난 3년의 모든 길이었다.


나의 -

생각 길. 웃음길. 눈물길. 설렘 길. 걱정 길. 해결 길. 산책길. 만남길. 수다 길. 먹방 길.

사색길. 음악 감상 길, 술길. 살길. 꿈길...


모델들의 우아한 런웨이로 라기보다  

종종거리며 런(Run), 달리는 일이 더 많은 일상다반사가 펼쳐지는 길이었지만,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도 고고하게 걷는 법을 잊지 않으려 했다.

만신창이가 된 기분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지치다 못해 처져서 땅 속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때도

허리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나의 런웨이를 걸을 때면,

웅크려있던 마음도 조금씩 스팀을 쬔 것처럼 펴졌었다.


그러나 -

이제 굿바이다.

이사 후, 이제 그 길이. 나의 출퇴근길이 될 수 없는 동선이기 때문이다.


새 집에서 밤에 잠을 잘라치면,

다음날 아침 씩씩하게 걸어 나갈 런웨이가 없음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불안함.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를 걸어야 하나 심했다.


질끈 감은 눈앞에 런웨이에서 스쳐가던 것들이 순서도 없이 지나갔다.


. 사시사철 양 옆. 똥머리 스타일로 쌩쌩이를 타고 나를 앞질러갔던, 영원히 뒷모습만 기억될 여자.

  (그녀를 따라가 볼까 했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한 독특한 아우라였기에)

. 비만개를 운동시키면서 본인이 더 수척해진 것 같은 개 주인.

  (매번 같은 시간에 트레이닝을 했다. 개는, 나를 알고 있다)

. 트렌치코트 끈이 땅에서 질질 끌리는 줄도 모른 채 약 800m에 달하는 길을 걸어오던 나를, 반대편에서 발견하시고는 끈을 잽싸게 주워 들어 공중에 휙휙 쳐대 가며 먼지를 털어주시던 생면부지 아주머니.

  (옷은 버려도 끈은 못 버린다. 감사해요^^)

. 서로 안 친하다고 말하는 남매가 운영하던 단골 한옥 파스타집.

. 개와 눈싸움하는 블랙캣이 있는 골목.
. 내가 만든 유일무이한 영화 속의 왈츠 장면을 찍던 돌계단과 조그마한 꽃화단.

. 비 오는 날 런웨이 옆 테라스 펍에 앉아 술을 마시다, 우비 입고 러닝을 하며 지나가는 호돌이 동생. 제케를  본 일이라던가.

. 그 전날 상의했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해 나와 회사까지 함께 출근하던 그날의 엄마와 나.

. 작년에는 건강하게 두 다리로 걸으실 수 있었던, 외할머니와 함께 앉았던 런웨이 길의 벤치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 길이 간절히 -


눈에 띄지도 않던 평범한 일상들은

보석같이 빛을 내며 그리움을 몰고 왔다.


비단, 스쳐 지나간 풍경들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나. 그때의 상황. 그때의 기억. 그때의 감정.  

그 모든 것들이 한통속으로 아름다운 추억과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

걷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길, 낯선 골목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워한다.

그런 내가. 옛길이 몹시 그리워졌다. 마이 런웨이.

밤새, 그 길이 걷고 싶어 마음이 아려온다. 마음이 아려와 잠이 안 왔다.

보고 싶고. 걷고 싶은 그 일상의 길. 그 안온감 같은 것이 그리웠다.


그 다음날 퇴근 후,

나는 ‘마이 런웨이’ 위에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게 런웨이를 걷고 있는데,

길은 내게 -

어떤 기억을 꺼내어주기 시작한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떤 변화를, 무조건적으로 갈망하고 있던 나.

달라지고 싶던 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던 나.

어떤 새로움을, 어떤 방법으로 추구해야 하는지.

답답해 미치겠던. 그렇게 간절했던 나를 기억해낸다.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새 길로 가야 한다. 새 방법을 찾고 새 파도를 타야 한다.


변화를 추구했던 내 욕망.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도 일단 새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 낯섦과 불확실성, 불안정함, 불편한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 파도를 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타봐야 한다. 


누구나 다 말해 본 이런 선언적인 기본 명제들은 너무나 쉽고 유치하고 식상하지만, 이 진부한 각오를 계속 되풀이하며 1m씩이라도 변화하고 싶다.  


그날의, 나의 런웨이는 내게,

고요하면서 떠들썩했고 친절하면서 냉정했다.


-

아직 섵푸른 길 위의 새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쫙 편 어깨, 조금 더 꼿꼿한 척추. 조금 더 또렷해진 눈빛과 걸음걸이.

그리고,

조금 더 꿋꿋한 당당함을 갖게 되길 바라며.


Newway


요새는 불멍, 물멍이 유행이지만,

나는 어릴 적, 요새식으로 말하면 개미멍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개미들이 자기보다 큰 과자 부스러기를 이고 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 작디작은 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 초코파이 부스러기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파브르 할아버지가 곤충을 보다가 곤충학자가 된 것은 정말 그럴만한 일이었던 거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뒤의 이 부분이다. 내가 요즘 개미가 된 것 같다고 느낀다는 것.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책상 위에 올라온 개미를 놀리려고 가는 길마다 코스모스 지우개로 막았다. 길이 막히니 개미가 딴 길로 돌아갔고, 또 막았더니 또 돌아갔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익숙한 런웨이를 떠나 뉴웨이를 찾고 있는 나는 뱅뱅뱅 돌고 도는 개미와 같다.


매일 아침. 안절부절.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 하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다.

어쩔 때는 같은 길을 5번도 넘게 10미터씩. 아닌가 긴가. 계속 가다 돌고- 가다 돌고.

코스모스 지우개에 갇힌 개미와 같은 꼴이다.


찾아야 했다. 마이 런웨이에 버금가는 어웨이크닝(awakening)의 시간. 혼자만의 시간이며 사색의 시간. 너무나 사수해야 하는 시간. 길을 찾아야 한다. 어디로 어떻게 걸어서 아침도 깨우고, 감성도 깨우고. 변화에 대한 욕구와 삶의 의지도 깨워야 할까. 자기 전 그리고 깨어난 후, 아직 매일이 고민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시간 아침에 듣는 클래식 방송의 디제이만큼은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방송을 하는 열의를 보이며 런웨이에서 들을 때처럼 루틴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출근길. 오늘은 왼쪽으로 가볼까. 쫙 뻗은 길이 아닌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저 쪽에 남산이 보인다. 근사하다. 더 가면 큰 건물들이 으리하다. 출근을 하는 사람들의 재촉스런 발걸음이 활기가 있다. X자, 스크램블 횡단보도는 예전 내 모교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한쪽 옆에 고풍스러운 돌벽으로 늘어선 빈티지 가게들은 모던과 전통이 섞여 멋있다. 저 너머에는 우리나라의 큰 대문이 떡하니 늠름하게 서 있다.  


뱅뱅은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이고 지고 또 길을 찾아 다시. 자기 길을 찾아갈 개미처럼.

나만의 뉴웨이는 찾아질 것이다.  

오랜 기간이 걸린다 해도, 돌아서 다시 와야 한다 해도.

그렇게 결국 찾아낼 것이다.


왼쪽. 오른쪽부터가 시작이다.

기대를 만들어 가자.


오르막 대로변에 활짝 피어있던 꽃들을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 사진을 찍었다.

 


Flowerway, Skyway


수선화도, 튤립도, 패랭이도, 라일락도 찍고 있자니,

저어기. 걸어가고 계실 할머니의 플라워 스카이웨이 상황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아버지는 만나셨으려나.



오늘로부터 30일 전, 이사를 막 마친 늦오후.

한 덩이 석양이 창을 통해 이삿짐과 거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 놀랍도록 포근한 주황빛이었다.  

창문을 열어 그 따뜻한 빛을 향해 손을 뻗어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다.

‘안녕, 잘 부탁해.

그리고 몇 시간 뒤, 친할머니의 영면 永眠 소식을 들었다.



빛을 선물해주고 떠나신 할머니,

당신은 -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을 걷고 계시겠지.

다리 아프시니까 할머니는 앉아 쉬시게 하고, 아버지는 일어선 채 쑥스럽고 멋쩍은 미소로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웃으며 바라보고 계시겠지.



중국의 문학가, 루쉰'희망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희망은 희망을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길은, 희망은,
걷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


내가 걸은 것만큼이 길이 된다. 희망이 된다.


우리는 전부 저마다의 길을 걷는다.

할머님도 걷고, 나도 걷는다.

함께 걷고 있다.



*

자, 내일은!?

오른쪽? 왼쪽? 어느 쪽?







'마이 런웨이'를 걸을 때마다 나의 BGM 이 되어준 ♬ Whole Lotta Love  

좋아하는 배우 엠마 스톤이 나오는 영화 크루엘라 ost는 그 당시 부부 듀엣이었던 Ike & Tina Turner (아이크 터너 & 티나 터너)가 부른 버전이다. 이 곡을 들으며 런웨이를 걷는 상상을 하며 출근하고는 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 부른 것은 완전 또 다른 차원! ♪Whole Lotta Love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따뜻한 감성 록 그룹 FF_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명곡,

♬ Walk   Newway를 오갈 때 요새 가장 많이 듣는 곡이다. 듣고 있으면 힘이 난다.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좋고,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의 파워 드럼도 정말 좋다!!!

(한 달 전 하늘로 간 테일러 호킨스.  R.I.P rest in pe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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