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방진 백조 Mar 19. 2022

내 방에 키이우

울지 말아요, 우크라이나여 "Не плач, Україно"

몸이 좀 아팠다. 드러누워있어도 안 편했다.

코 앞으로 다가온 이사 부담에 짜부콩이 되어 버린 듯했다.

짐들이 점점 빠르게 내리 꽂히는 테트리스 게임을,

머릿속에서 이미 몇 판을 뛰었는지 모른다.


거무튀튀한 마음속 덤불을 헤집고, 몹쓸 복닥거림을 무시한 채,

벌떡 일어나 정리해야 할 짐들이 머릿속 게임기가 아닌,

실제 내 작은 방에 산적해 있었다.  


짐에 걸려 잘 열리지도 않는 문 틈을 통해,

저마다 사연을 가진 물건들의,

잘도 감춰뒀던 '내 욕심들의 합창’ 이 들려온다.  

짐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노래 같다.


발 디딜 틈 없는 방에 그냥 서 있다던 내게,

‘구도자여, 길을 내시오~’ 친구의 응원 톡이 기억 나,  

바닥을 발로 스~윽. 길을 만들며 들어갔다.

오만상 기합 (차마 봐주기 어려운 내 식의 얼굴 기합)을 넣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있는 힘껏 심하게 구겼다가  

‘퐉!’ 뜨니, 바로 정면에 -

‘그것’이 있었다.


카키색 통가죽 가방

우크라이나에서 온 백팩이었다.  



언젠가 드럼칠 때 입고 싶어, Queen의 한정판 티셔츠 구경을 위해 가끔 들르곤 했던 독특한 편집샵들을 모아둔 해외 직구 사이트였다. 달끈하게 취한 밤, 휴면계정으로 돌리기 전에 소비를 좀 하라는 로그인 독촉 메일에 기분 좋게 낚여주고 홈피를 열었는데, 사고 싶었던 칼라의 백팩이 보였다. 배송비가 무료랜다. 시원하게 카드결제를 하고, 이 백팩을 산 합당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한 해를 수고한 것 같은 나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매해 내게 작은 선물을 주곤 했으니 충동구매도 아니다. 나만의 전통?! 이런 거지 뭐. 달끈!


그 구매가 ‘와인달끈 효과’ 였음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노트북을 넣을 수 없는 사이즈였던 것이다. 심지어 물건을 산 곳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의 핸드메이드 가죽 공방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 ‘왠 우크라이나?’ 여행 중에 산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우크라이나 가방을 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 결제 취소 표시가 없어 메시지란을 겨우 찾아 동생이 나를 위해 비슷한 백팩을 사 왔다고 취소하고 싶다고 썰을 풀었다. 3일이 지나서야 답이 하나 달렸다. Pavel이라는 남자였다. 프로필 사진을 보니,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날씨 좋은 여름날, 어느 공원 계단에 앉아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매를 취소하지 않을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할인을 해줄 테니 나더러 취소를 하지 말아 달라’ 고 했다. 3일 만에 연락 와서는 취소도 안 해주고, 몇 프로 할인해줄 건지도 말 않고. 살짝 불쾌감이 들어 그냥 취소해달라고 하려다가 프로필 사진의 미소가 약간 머쓱해 보여서 ‘얼마를 할인해줄 거냐’ 고 물었다. 또 3일이 지나 달린 답변. ‘10% Refund’. 메시지 보내고 3일씩 기다리는 것도 감질나고, 취소처리하고서도 분명히 한참 걸릴 것 같아 그 가격에 사겠다고 했다.

12월 31일이기에 선심 쓰듯 Happy New year ~ * 인사를 해줬더니 바로 답이 왔다.

thanks :) Happy New Year.  

키이우에서 온 카키색 백팩 & Pavel과 주고 받았던 메세지


잊고 있다가 가방은 잘 오고 있겠지? 배송 현황을 보려고 오랜만에 홈피에 들어가 보니, 안 읽은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날짜는 마지막 인사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쓰인 것. 이름과 주소를 영어로 다시 알려 달랜다. ‘아니 여태 물건을 안 보내고 있었던 거야? 작년 얘기할 때 알려달라고 하지.’ 집 앞이 바글대는 대학가 쇼핑가라 가방이 지천에 널렸는데 내가 왜 해외직구를 해서... 후회. 달끈한 와인이 웬수다. 하면서도 친절히 알려줬다.

Pavel의 마지막 말은 웃음없는 thanks. 작년 12월에 구입한 가방은 22년 2월 초에 도착했다. 10% 리펀드는 없었다.


그 후, 우크라이나 백팩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동슬라브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도(古都) 키이우와 제2의 도시 하르키우 등 7개 주요 도시에 미사일 비가 쏟아졌다.  


남동부의 평화롭던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쑥대밭이 되었다.

새 생명이 모여있던 산부인과가 폭격당하고 산모와 태아가 함께 죽었다.

포격으로 부상당해 심폐소생술을 받던 6살 소녀의 심장소리는 끝내 되돌아오지 못했다.

어린이 병원이 파괴되었고, 인구 40만 명이 생필품이 끊긴 채 고립되어 눈을 녹여 마신다.

죽은 시민들이 집단 매장되고 있으며, 숨진 민간인, 군인과 수습되지 못한 시신도 많다.

매일 50~100번의 포격 소리가 나는 생지옥, 마리우폴의 사망자는 추정 2500명에 달한다.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는 마리우폴과 함께 전쟁 시작부터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곳이다.

최소 500여 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24개의 대학과 20만 명의 학생, 교수들로 활기찼던

예술과 문학, 학문의 젊은 도시는 신음하고 있다.  

하르키우의 하늘에서는 지금도 밤낮없이, 포탄이 비처럼 쏟아진다.  


18일에는 외국공관이 모여있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부 도시 르비우 첫 폭격이 있었다.

북부 도시 체르니히우, 북부 외곽 지역인 부차호스토멜, 수미 등지의 여러 곳에서도 보통 사람들의 삶은 무너지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렇듯 키이우 인근 도시들을 공격해오며 포위망을 좁혀, 수도 키이우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키이우까지 약 30km가 남았다고 했다. 침공 20일째 새벽, 메마른 키이우에 날카로운 포성이 들리고 아파트들이 포격당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은 거세지고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진 =  연합뉴스, BBC, 뉴시스)


이렇게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키이우를 안 떠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홀로 된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의용군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자원봉사자들.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 두렵고 힘겨운 마음을 서로 의지하고 있다.

어쩌면 매 순간 저마다 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마음을 다지고 있겠지.  


우크라이나 난민을 태운 폴란드행 피난열차는 생과 사를 가르는 거대한 운명처럼 보였다.

국가총동원령이 선포되어 18~60세 남성들의 출국이 금지된 우크라이나의 아빠는,

피난열차 창문을 통해 아이의 손을 느끼며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으리라.   






키이우, 내 카키색 백팩의 고향.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우크라이나의 지도와 공격당한 도시들, 키이우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화살표. 마음 아픈 기사들, 사진들을 계속 따라가 보고 있는데.


굵고 또리또리한, 촘촘하고 가지런한. 풀잎색 실로 꿰어진,

바느질 선이 멋스러운 카키색 백팩이 ‘정겹게’ 나를 본다.


Pavel 이 그 두꺼운 통가죽을 무거운 쇳가위로 자르고 눌러 ‘꾹꾹’ 바느질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열심히 잇고 기웠을 것이다. 너무 두꺼운 부분은 기계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지금 보니 더 꼿꼿해 보인다. 각을 잡고 서 있는 것 같은.

무슨 가방이 저렇게 늠름하게 서 있지?

총을 든 우크라이나 여자 병사 같다.


Pavel 스토리

Pavel은 12월의 어느 즈음, 내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지 모른다.
설마 그러겠느냐는 Pavel에게 친한 우체국 직원은 러시아의 믿을만한 소식통한테서 들은 거라며 가방 재고를 빨리 처분해 피난용 현금을 만들어놓으라고 했을 것이다. Pavel은 남쪽 오데사와 마리오폴에 계신 부모와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둔다. 가족들이 피신할 나라들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 주문받은 건들은 연말 할인에 배송비 무료 조건으로 팔아치우기 시작한다. 전쟁 준비를 위해 매일 총 다루는 법 훈련에 나갔다 오는 아내와 여동생을 챙기고, 틈틈이 주문한 물건들을 포장해 보낸다. 물건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할 여유가 없다. 전쟁 시 Pavle은 징집될 것이므로 어린 딸과 아들, 아내가 편안하게 나를 기다릴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야 한다.  


한참을 앉아있었는지.

갑자기 올라온 냉기에 ‘오르르’ 몸이 떨렸다.  

시큰한 기운이 ‘훅’ 들어와 기침을 하다가 눈물이 나버렸다.

그래도 나를 그냥 이 상태로 좀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 우크라이나 어딘가에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텐데.

자식도 다 잃은 거동도 불편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실 텐데.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딸인, 명령을 받았을 뿐인 군인이 있을 텐데.

공습을 받아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간 9살 소녀 샤샤도 지금 지옥을 참고 있을 텐데.

더 차갑고 더 아파보자.라는 생각에 한참을 좀 더 춥게 있었다.  


짐과의 테트리스니 뭐니 하는 어수선 따위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내 안의 전쟁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헬기가 나타나더니 무시무시한 폭격 소리와 동시에 바로 옆에 걷고 있던 전우가 죽어 저만치로 날아가 떨어졌다는 얘기를 아버지 편지에서 읽은 후, 할머님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인 아버지께 답신을 보내셨다.

‘죽지도 죽이지도 말라’ 스무 살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전쟁을 견뎠다.


우크라이나 소년과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이 장난치듯 대화하는 영상을 보았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 죽기도 죽이기도 싫은 전쟁을 하는,

그곳에 -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한 삶이 있다.


삶과 죽음 앞에서

... 숙연해야 한다.  



조국을 지키겠다며 자진해서 의용군에 입대한 회사원과 사업가 커플이 군복을 입고 결혼했다.

몇십억 드레스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결혼. 시작 

폭격 중인 도시에서 의료경험이 없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갓난아기가 태어났다.

희망을 부르는 탄생이었다. 탄생. 신비

러시아군에 완전히 점령되어 구호도 끊긴 도시, 부차의 드미트리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어

자신을 놓고 가라 애원하던 할머니를 끝까지 모시고 와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할머니 두 분과 여동생, 이웃 두 명과 함께였다. 고마웠다. 가족, 영원한 동지.

국외에서 거주 중이던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조국과 가족, 친구와 친척을 지키겠다며 고향 우크라이나로 귀국해 군에 입대하고 의료 지원자가 되고 있다. 누구도 시킨 것이 아니다.  나, 나의 존엄함만큼 존엄한 타인.  


전쟁 속에서도 전쟁 밖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다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값진 연대와 유대감>  키이우 광장에서 튤립 150만 송이로 우크라이나 국장(國章)인 '삼지창'을 만들며 희망을 그리는 사람들 [키이우=AP/뉴시스]




내 방에 키이우가 있다.


우크라이나와 세계.

온전한 삶과 평화.

희망과 기원을.

내 작은 방 안. 작은 백팩이 품고 있다.  


살아있기를 바래본다. 살아남기를 바래본다.

내 카키색 백팩의 고향, 키이우. 백팩의 아버지, Pavel.

웃음기 없어도 좋으니,  

"Happy New Year!"

Pavel과 다시 한번 그 인사를 나누게 되기를.





2개의 곡이 생각났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이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연주하신 ♬ 리스트의 Consolation No 3 (위안)의 

평화로운 선율이 혹사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사람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분들의

영혼에도 스며들기를.


36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작은 나라 몰도바,

예전부터 좋아하던 집시 바이올린 곡 중에 ♬Moldova(몰도바) 란 곡이 있었는데,

집시 바이올린의 거장, 세르게이 트로파노프(Sergei Trofanov)와 그가 이끄는 집시밴드 젤렘의 곡이다.

밴드의 기타, 보컬 아나톨리 아야코벤코는 우크라이나 출신.  

섬세하고 감성적인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세포 깊숙이 들어와 큰 위로가 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Liszt 6 Consolations No. 3 In D flat  

                                              세르게이 트로파노프 & 젤렌 ♬ Moldova




                                                  

                                         울지 말아요, 우크라이나여.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Не плач, Україно

                                                Миру Україні







우크라이나 국기는 파란색과 노란색이다.

유럽의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땅이 비옥해 무얼 심어도

곡식이 쑥쑥 자라 풍요로운 황금색 밭을 선사해준다.  

바로 그 위의 파란 하늘은 물처럼 맑고 광활하기 그지없다. 

황금밭과 파란 하늘의 어우러짐.  

한 폭의 그림 같은 평온함.


우크라이나 국기 & 파란색은 하늘, 물. 노란색은 밀, 불을 의미한다





※ 국립 국어연구원은 현지음을 존중하는 내용의 우크라이나의 지명 14건의 한글 표기 발음을 확정했다.

그간 러시안식 발음이었던 수도 키예프는 ‘키이우’가 되었고 서부도시 리비프는 '르비우'가 되었다. 그 외 ‘아조우해’, ‘베르댠스크’, ‘보리스필’,  ‘드니프로’, ‘하르키우’, ‘흐멜니츠키’, ‘크라마토르스크’, ‘루츠크’, ‘오데사’, ‘시베르스키도네츠강’, ‘빈니차’ 등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법 바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