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쉬플랏 Sep 01. 2021

그럼에도 시작되는 관계는 있다

오늘의 단어: 시작

 어릴 때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작을 경험했다. 못해도 1년에 한 번은 새  학년이 시작되었으니까. 새 교과서를 받아오는 날에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 지문을 앉은 자리에서 읽어버렸고, 봄방학이 흐르며 3월이 다가오면 낯가리는 내 심장은 작게 두근거렸다. 담임 선생님은 무서운 분일지 재미난 분일지, 반에 잘생긴 남학생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것도 새 학년을 시작하는 날의 소소한 재미였다.


 이제 일부러 마음먹(고 초인의 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면? 이직 준비를 해야 한다. 퇴근 후 지친 눈으로 들여다보는 이력서는 흐릿하다. 뭔가를 배우기 시작하고 싶다면? 온라인 클래스나 스터디, 문화센터를 뒤져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게 필요한 과목을 골라서 시간표대로 가르쳐 주는 시스템은 이제 없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어려운 건 역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다. 매해 새로운 인물들이 수혈되던 학창 시절과 달리, 이제는 찾아다니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도 적고 무엇보다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어쩌다 만난 사람과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에 약속을 잡아볼까 하다가도 '아이, 만다꼬'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다. 하물며 특별한 호감이 들지 않는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시작되는 관계가 있고 시작되는 일이, 취미가 있다. 마음을 먹고 초인의 의지로 실행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해도 나이 먹었다고 시작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을 먹고 초인의 의지로 실행하는 일이라 그런지 더 재밌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벌려 놓은 일이 많아 당분간은 숨 고르기를 조금 해야겠지만, 다음 달의 나는, 내년의 나는 또 뭘 시작하기로 마음먹을지 사뭇 궁금하다.

작가의 이전글 매달 5만 원의 약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