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팅낙을 더위로부터 지켜준 사람들
생각보다 상하이의 삶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모든 것이 새롭고 미숙했지만 흥미로왔다.
단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엄청. 매우. 많이. 짱. 대박. 쩔게 더웠다는 점?
습기와 더위를 모두 가진 상해의 여름은 말 그대로 '쩌죽는다'였다. 40도가 넘는 일상을 보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런 무더위와 수많은 미션을 안고 살아가던 중! 가장 처음 실패한 미션은 내가 녹아내리기 전에 더위를 식힐 '시원한 수박주스 마시기'였다. 중국 문화나 상점 특성을 잘 몰랐기에 여름에 파는 모든 음료는 당. 연. 히 多冰(얼음 겁나 많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더위에 녹아내리고 있던 내가 커피 대신 선택한 수박주스.
기숙사 바로 앞에서 파는 과일주스 가게에서 자신만만하게 시켰던 수박주스가 날 실망시킬 줄이야! 14 위안을 내고 받아 든 수박주스는.. 마치 한여름 엄마가 먹으라고 잘라서 거실에 내놓은 지 2시간이 지난 수박을 갈아놓은 느낌이었다.
내가 수박주스 샀는데 너네 마셔볼래?
상해에서 내가 가장 처음 내뱉은 한국말은 미지근한 수박주스 권하기였다. 한국'어'로 한국'사람'에게 말을 건 첫 번째 순간이랄까. 내가 발견한 가장 처음의 두 한국 사람은 다행히 나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앞으로도 모르는 일로 하겠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상해에 도착한 지 딱 삼일째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각기 상해에 와서 생긴 에피소드를 늘어놓느라 바빴다. 실제로 나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이야기할 게 너무 많아서 장난 삼아 손을 들고 이야기할 순서를 정하곤 하는데, 이 친구들과는 죽이 잘 맞아서(?)인지 처음부터 오디오가 겹쳤다.
수박주스에 대한 묘사를 하고 그들에게 권했을 때 우리는 동시 빵 터졌고, 아무도 수박주스를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보통 처음 만난 경우 마셔보는 척할 법도 한데 나도 나지만 걔네도 참 걔네다.
뭐, 덕분에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게 상하이의 여름을 보낼 남자 사람 동생들을 만나며 마음 맞는 파티원 모집에 성공했으니 만족.
타고난 기질인지 일을 하며 다져진 내공인지는 모르나 앞서 본 것처럼 난 모르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에 거리낌이 적다. 한국 인치고 영어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도 딱히 없다.
Hello. My name is Stella!
Nice to meet you:D
외국인과 꼭 룸메를 시켜달라는 내 부탁으로 나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룸메는 중국계 호주인 친구였다.
방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친구들을 데려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먼저 제안했다. 당연히 대답은 OK. 외국에 공부를 하러 와서 점심 또는 저녁 제안을 거절하는 경우는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도, 우리도 친구를 사귀고 외국어를 공부하러 온 것이기에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중요한 건 그걸 언제 어느 때에 적절하게 말하느냐의 문제일 뿐.
우연히도 나의 반 친구 중 몇 명과 내 룸메가 이미 친구였기에 저녁식사 자리에는 무려 10여 명이 함께 하게 되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호주 등 태어나서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 말을 섞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외국인 친구들은 나에게 친근감을 느꼈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내 영어 이름인 Stella를 지어준 것도 바로 이 친구들이다.
중국어 기초반인데 영어 회화까지 공부하며 친구들과 어울렸던 건 애초에 중국을 선택한 이유가 친구들과는 영어를, 학업은 중국어를 하며 두 가지 언어를 병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계획은 거진 완벽히 맞아 들어갔다. 나는 니하오반(생초급)이었기 때문에 평소 조금이나마 유연한 대화를 위해서 외국 친구들과는 영어로 대화해야 했고, 한국 친구들과는 다양한 미션을 깨면서 모자란 중국어 회화 시간을 채웠다.
중국인데 중국인 친구가 없다니?
다들 상해에서 공부하니 당연히 중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겠거니 하는 것을 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는 그리 흘러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해에 오기 전 간간이 듣던 대로 상해는 '외국인 특혜'라는 것이 없었다. 외국인 특혜가 없다는 건 내가 '외국인 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인 친구들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我是外国人, 所以我不知道
1) 먼저 말 걸기
2) 웃으면서 이야기하기
+ 필요조건) 다음 약속 정확하게 잡기
+ 충분조건)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언어 실력 갖추기
"저 외국인이라서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면 돼요?"
내가 상해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모르는 것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친구가 된다. 외국인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니 현지인에게 물어보고 실질적인 팁까지 얻을 수 있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기본을 지키면서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언제 어디서든 좋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이번 여름 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하며 자연스레 이 곳에 녹아들어 가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았을 때 조금 더 넓은 형태의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내가 앞으로 어느 곳에서 살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 한국에서만 생각하던 상식들이 조금씩 깨지고 다듬어진다.
하루하루 다르게 느껴지는 상해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나도 비로소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소소한 의미에서 나는 어제보다 더 나아지고 있다.
*본문에 삽입된 중국어가 틀린 경우 비밀스럽게 저의 메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skrusl2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