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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Sep 22. 2023

딱 하루 제로지출해 봤다.

23년 9월 20일. 제로지출했다. 아무것도 사지 않은 날! 어땠냐면.. 속 시끄럽지 않았다. 전기 코드를 뽑아 전기세를 줄이듯이 내 에너지를 아낀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선택하는데 에너지가 꽤 쓰였다. 

생필품인 샴푸하나 사려고 해도 염두에 둘 항목이 너무 많다. 50가지가 넘는 성분이며 300ml, 500ml, 480ml... 용량별로 가격대가 다르고 펌프형과 아닌 것도 있다. 향도 지성과 건성용에 따라 다르고. 이게 좋을까, 아냐 뚜껑이 펌프형이 아니라서 패스. 그냥 지난번에 쓰던 거 살까? 아냐, 이번엔 좀 다른 브랜드 거 써보고 싶은데, 전 성분을 좀 살펴보자. 

그러다 실리콘이 있는 건 두피에 안 좋다고 하니 무실리콘 샴푸를 살펴본다. 무실리콘 샴푸라고 해도 주의할 점이 있단다. 거기 들어가서 다시 한번 정보를 챙겨본다. 그러다가 겨우 샴푸를 골랐지만 마지막 난관이 있다. 쇼핑몰 별로 가격이 다르다. 배송비도 다르고, 가장 싼 쇼핑몰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배송이 2주씩이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으~ 또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30분이 훌쩍 지나고 겨우 고른 샴푸를 지친 상태로 결제한다. 빨리 끝내버리고 말자 싶은 마음으로. 


결제가 완료됐다는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현타가 온 거지. 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지나 있었으니까. 샴푸 하나를 고를 때도 보이는 정보가 너무 많다. 선택하는데 에너지를 줄이려면 나만의 기준이 무조건 필요하다.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선택하느라 시간 낭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다. 하루 1440분 중에 30분을 샴푸하나 사는데 쓰지 말자.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해야 했다. 다음번엔 클릭 2번만으로도 샴푸를 장바구니에 넣을 수 있도록 하고, 결제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5분이 넘지 않도록 스톱워치를 켜두어야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샴푸 말고 다른 항목들도 선택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브랜드와 가격대를 정해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뭘 사려면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초개인화 시대라는 말은, 물건이 너무 세분화돼서 취향과 자신의 기준이 없으면 선택만 하다가 결정을 못해서 짜증나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단 말로 들린다. 물건 종류, 그걸 파는 곳, 파는 방법 등 많아도 너어무 많다. 결정을 못해서 짜증을 낼 바엔 차라리 안사는 쪽을 선택하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이 참에 선택에 드는 내 시간과 정신적인 에너지를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을 위해 2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웬만하면 안 사려고 마음먹는 거다. 

한번 뜯은 과자 봉지를 밀폐하기 위해 집게를 찾았을 때 없으면 바로 다이소로 갔다. 이젠 이젠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희한하게도 집게 비슷한 걸 찾으려는 마음으로 보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진다. 밀폐까진 아니어도 나쁘지 않으면 됐다. 물건은 이미 차고 넘친다. 버려도 없어도 사는데 별 지장 없는 것들도 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의미를 만드는 거다. 

내가 왜 물건을 웬만하면 안 사려고 하는지. 남과 상관없이, 나만의 의미가 있어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아인슈타인이 남긴 명언만큼 거창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하지도 못하지만) 그저 내가 나를 설득시키면 충분하다. 그러니 바늘구멍만 한 미세한 의미여도 된다. 


웬만하면 아끼고 안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이들이다. 나야 지금 죽어도 괜찮다. 후회 없고 여한도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직 지구에 산지 15년, 17년밖에 안 됐다. 살아갈 날이 100년쯤 남은 아이들을 위해서다. 


그 아이들이 20살 때 샤워할 물을 지금 미리 당겨서 쓰고 있으니 줄어야 하고, 그 아이들이 30살에 써야 할 전기를 내가 빌려 쓰고 있으니까 당연히 아껴야 한다. 아이들이 40살이 돼도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셔야 하니까 지금의 나는 물건을 하나라도 덜 사야 맞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득된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퍽퍽하게 살겠다는 건 아니다. 우리 할머니세대처럼 무조건 가족에게 희생하느라 자기를 잃어버린 채로 살고 싶진 않다. 할머니의 슬픈 희생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난 그동안 누릴 만큼 누렸으니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를 위해, 이젠 덜 쓰고 안 사고 있는 거를 활용하며 살아도 충분하니까 더, 더, 더 좋은 거를 찾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딱 그 정도다.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는 얼추 된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게 습관인데, 옷은 관리만 잘하면 10년 넘도록 입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먹는 건 딱히 식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라서 괜찮다. 먹방도 안 좋아하고 야식도 안 먹는다. 체중을 급격하게 늘렸다가 줄였다 해야 하는 배우도 아니니까, 지금의 체중을 유지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운동 습관도 장착했다. 준비가 됐으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온라인쇼핑몰 기웃거리느라 손가락 움직이는 대신 아령을 잡아야지. 


나 하나라도 물건을 덜 사야 애들이 살아갈 지구가, 샴푸통 하나만큼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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