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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09. 2023

내 인생에는 절대 없을 줄 알았던  단어, 자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록이라서 쓰는 2번째 일기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한다. 내가 갖고 있던 삶의 경험은 정말 소용없단 확신이 날이 갈수록 단단해진다.


사람이 죽기 전, 살아온 삶이 영화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2022년 2월 22일에 발표된 미국 루이빌대 연구팀의 논문에 의하면, 죽기 직전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는 의학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단정은 아니고 짐작이라고는 하지만.

뇌과학자들이 말하길, 그 이유는 죽기 직전 그 절박한 순간 얼른 해결하기 위해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의 경험을 스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했다. 즉, 뇌는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경험한 정보 속에서 방법을 찾기 때문이라고. (출처: 장동선 뇌과학자 유튜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한 달 전 아들이 자퇴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등학교 때 내 모습을 나도 모르게 떠올려 빠르게 스캔하고 있었으니까. 아들이 자퇴하려는 이유가 친구관계 스트레스,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의 모습이라고 했고, 그것과 관련된 답을 찾기 위해 31년이나 지난 내 머릿속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낡은 정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때의 나를 기준으로 지금의 아들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난 자퇴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힘들어도 감당해야 할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쟨 왜 저러나 싶었다. (물론 그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히 그랬을 거란 짐작이다)

30여년 전보다 나은 교사들의 태도, 내 부모에게 받은 것보다 더 다양한 것을 누리고 있는 아들의 물질적인 환경, 공부 말고 다른 것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정보들. 31년 전보다 더 나아진 것밖에 없는데 왜 자퇴를 한다고 하는지.

내 과거를 기준으로 지금의 아들을 보니까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었다. 답은 없고 머리만 아팠다. '왜 저렇게 나약하나, 내가 저렇게 키웠나, 어떻게 저 정도도 못 참나, 자기가 할 일을 따박따박하지 않아서 생긴 부작용을 괜히 학교 탓하며 자퇴하려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아들과 나 사이에 드리워진 커튼같았다. 아들이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90년대 초 교사들은 학생의 머리 길이가 귀밑으로 내려왔다는 이유로 뺨을 때렸고, 수업시간에 말대답한 아이를 발길질했다면서, 지금 시대는 그렇지도 않은데 그 정도 스트레스도 못 참냐는 말을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엔 그런 기준이 분명 있었다.


기준으로 아들을 보니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원망이 일어났다. 자퇴하고 집에만 있는 꼴을 매일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암담함도 생겼었다. 밥을 하루 세끼 꼬박 신경 써야 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 밥 먹으라는 말을 3번 이상은 해야 졸린 듯한 얼굴로 마지못해 나와서 주섬주섬 밥과 반찬을 쟁반에 담아 자기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최소 2년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거친 한숨부터 나왔다.   


난 그런 아들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속 좁은 인간이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힘들어하는 아이 마음도 수용 못하는 편협한 인간이 '엄마'라는 걸 하고 있으니. 아들에게 미안했다.

내 과거의 경험 때문에 내 중심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이랬는데, 넌 왜 그러냐는 일차원적인 원망이었다. 이해가 아니라.

더불어 내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아이도 아이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더 펼쳐질까 싶은  두려움, 과연 자퇴하고 집에 있는 아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답이 없을 땐 눈을 감는다. 방금 전까지 돌아본 내 마음을 빼기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잘 버려지지 않았다. 소금병을 거꾸로 들었을 때, 좁은 입구로 소금이 한꺼번에 몰리면 잘 안 나오듯, 너무 마음이 꽉 차 있을 땐 버려지지도 않는다. 이럴 땐 빼기명상을 어떻게든 하겠다고 용쓰며 눈감고 계속 떠올린 것들을 보고 있는 것보단 걷는 게 나았다. 빨리 버려서 얼른 내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는 욕심이 있으면 어파치 잘 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작정 걸었다. 걸으며 울적한 생각을 정리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 인정해야 했다. 지금의 시대빨리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내 자식의 문제를 맞닥뜨리니까 진짜 아는 게 아니었다. 


스마트폰과 함께 자라고 시리(Siri)에게 알람을 맞춰달라며 손가락 대신 ''하고 코로나로 비대면을 겪은 아들의 인생을, 어떻게 31년 전 내 삶의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저 참고용으로만 듣기에도 너무 안 맞는 허접한 정보다. 꼴랑 내가 살아온 경험 하나로 남의 인생을 나도 모르게 평가하고 부지불식간에 판단해 버리는 이 자동화된 시스템을 하루라도 빨리 박살 내버리고 싶어졌다.

겨우 '내'가 경험해 본 '31년 전 내 학교생활' 토대로, 2023년을 살아내고 있는 아들의 힘겨움을 가볍게 판단하고 평가절하했다. 지나가도 한참 지나간 90년대 초의 고등학교 생활을 잣대로. 내가 미쳤지. 어리고 어리석은 건 아들이 아니라 나였다.


16년 전 길거리에서 '지금은 유모차도 있고, 기저귀도 잘 나오는데 요즘 기엄마들은 뭔 애 키우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 대나' 하셨던 시어머니뻘 되는 분들의 말. 지나가듯 던지는 말 한마디에 눈을 흘기고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어쩌면 자퇴라는 말을 듣고 내가 보인 반응 때문에 아들도 그런 비슷한 생채기가 마음에 남은 건 아닐까?


자퇴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아닌 고리타분한 아줌마로, 마음 툭 터놓고 상의하고 싶은 어른이 아닌 그저 자기 경험을 내세운 속 좁은 인간으로 아들의 말을 듣는 척했다. 아들에게 처음 자퇴하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깊숙이 돌아보게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아들의 힘듦을 깍아내렸는지. 자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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