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처럼 아침에 눈을 떴는데 벌레로 변하지 않았다. 그 소설은 왜 벌레로 변했는지 왜 하필 강아지나 새가 아닌 벌레였는지조차 구구절절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책 읽는 내내 내가 벌레로 변한 것만 같았다. 내일 아침 '나도 변하면 어쩌지?' 걱정하게 될 만큼 이입하게 했다. 벌레로 변한 채, 직장상사까지 집에 와 있는 문 밖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상상해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였는지 아침에 벌레로 변하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살고,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막막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땐 한약을 먹듯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는다. 그러면 내가 어제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 벌레라면 못할 일을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하나하나 손꼽으며 하루를 살아본다.
학교 다녀온 아이에게 어제와 같은 목소리로 눈을 바라보며 잘 다녀왔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아이가 같은 반 친구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말을 들으며 같이 흉도 봤고, 과학선생님이 너무 지루하게 해서 졸았던 얘기도 들었다. 가족들이 벗어놓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시작버튼을 누르고 세제를 넣을 수도 있었다. 콜롬비아 리치피치 원두를 갈아 향을 한껏 들이키며 내린 커피를 마셨고, 딸아이는 밀크티를 마시며 둘이 함께 점점 노래져가는 은행나무들을 보며 뜬금없이 나무평판도 했다.
'엄마 세 번째 은행나무가 제일 이뻐보여'
'그래, 그러네 난 음.. 왼쪽에서 두 번째 거도 이뻐!'
아마 내가 벌레였다면 못했을 일이다. 그와 더불어 이런 상상도 가끔 한다. 설거지 하는 게 귀찮고, 세수하는 것조차 누가 대신 해줬으면 할 때,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해 보이고, 나만 뒤처진 것 같거나 앞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적어지는 것 같아 괜히 억울할 때, 독박육아와 시집살이로 보낸 15년이 너무 아까워 결혼을 선택한 자신을 탓하느라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 마음버리는 일이 가끔 지겨워질 때 의외로 상상이 도움이 됐다.
아침에 눈떴는데 팔이 하나 없으면?
아침에 눈떴는데 침대가 아닌 길바닥이었다면?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면?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팔이 몸통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다르게 느껴진다. 자고 일어난 침대를 손으로 한번 다시 만져보며 휴 다행이다~ 되뇌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 목을 스트레칭하며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아났다는 것에 기쁘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톰 크루즈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다. 귀찮다는 생각, 세수도 하기 싫은 게으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버리고 버려도 또 있다는걸 인지하게 될 때 아, 이젠 그만할까?라며 마음 버리는 일을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 됐지 뭘 더 큰 걸 바랬을까. 오늘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리면 되고, 벌레가 아닌 사람의 몸으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어서 새삼 다행스럽다. 난 운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