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1)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오데트다.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사교계 여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완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변신”은 인간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자기기만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정교한 실험실과 같다.
오데트는 원래 그 자체로 특별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양도 부족했고, 상류층의 전통적 취향과도 맞지 않았다. 스완의 주변 인물들은 오데트를 “평범한 여성”, “약간 속물적인 여성” 정도로 취급했지만, 스완은 그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했다. 오데트의 변신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오데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스완은 오데트를 실재의 인물이 아니라, 보티첼리의 여인상과 같은 예술적 이미지로 재창조했다.
그는 그림 속의 우아한 여인의 특징을 오데트에게서 억지로 찾아내었고, 그 환상의 얼굴을 그녀에게 덧씌웠다. 즉, 그는 오데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데트 안에 스스로 만든 이미지를 사랑한 것이다. 이 순간 오데트는 실제 자신이 아니라, 스완이 만든 상징적 존재가 된다.
바로 이것이 오데트의 첫 번째 변신이다.
변신의 주체는 오데트가 아니라 스완이며, 변화의 재료는 오데트의 실재가 아니라 스완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 변신은 점차 오데트의 실제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스완의 사랑과 집착, 그의 이름과 명성이 결합하면서, 오데트는 사교계에서 점차 지위를 얻게 된다.
마치 연극에서 한 배우에게 특정 배역이 부여되면, 시간이 갈수록 그 역할이 실제 성격을 규정해버리는 것처럼, 오데트는 “스완 부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신분을 얻게 된다. 과거의 오데트는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오데트—상류계의 규범을 따르고, 세련됨을 흉내 내며, 스스로를 새로운 계급의 여성으로 여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것이 오데트의 두 번째 변신이다.
하지만 이 변신이 진정한 변화일까?
프루스트는 말한다.
변신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욕망의 투사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오데트의 변신은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덧칠되는 이미지의 게임이다. 스완이 부여한 의미가 오데트라는 인물을 덮어 씌우고, 결국 그녀가 그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스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오데트라는 실재를 보지 못했다.
그는 오데트를 만든 것도 아니고, 그녀를 알아본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이 만든 오데트와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한마디로 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간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상대의 실체보다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 상대가 가져다줄 것 같은 만족을 더 크게 사랑한다. 그 욕망이 강할수록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결국 사랑의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한 방식이 바로 그러했다.
이 사랑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낳는다.
환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현실은 늘 환상을 배신한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심이 생기고, 작은 변화에도 질투가 솟구친다. 스완이 오데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불안해하며 고통받는 이유는, 오데트가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스완이 그녀를 실재가 아닌 환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환상은 깨지는 순간 고통이 되고,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 순간 고문이 된다. 스완은 오데트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집착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오데트’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자기기만이 사랑의 비극을 낳는다.
이 장면은 단지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신앙의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오데트의 변신에서 비롯된 스완의 사랑과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나를 축복해주는 하나님, 나의 기도를 빠르게 응답하는 하나님, 내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 내가 신념으로 붙든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모두 내가 만든 하나님이다. 이것은 신앙의 깊은 자기기만이다.
이런 신앙의 특징은 명확하다.
첫째, 결핍 중심의 신앙이다.
이미 주신 은혜보다 아직 받지 못한 응답에 더 마음이 움직인다.
둘째, 투사적 신앙이다.
하나님을 내 욕망의 거울로 만들어버린다.
셋째, 우상적 신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 이미지를 사랑한다.
스완의 사랑이 오데트 위에 “보티첼리의 여인상”을 그려 넣은 것처럼,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도덕·정치·심리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 이미지를 하나님이라고 오해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결국 자신이 만든 우상이 된다.
오데트의 변신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쉽게 실재를 보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가를 보여주는 문학적 우화다. 스완이 사랑한 것은 오데트가 아니라 오데트의 그림자였듯, 많은 이들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 만든 그림자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쉽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곧 신앙의 좌절이 된다.
오데트의 변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랑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는가?
아니면 네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가?”
프루스트는 말한다.
사랑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순간 시작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진짜 신앙이 시작된다.
우리는 스완이 오데트를 본 방식이 아닌, 예수가 사람을 본 방식으로 사랑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다.
환상을 버리고 실재를 마주하는 용기.
그리고 내 욕망이 만든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오데트의 변신은 결코 한 여성의 변신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왜곡하고, 신앙을 왜곡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진실한 거울이다. 그리고 이 거울은 오늘 우리 신앙인의 얼굴 앞에 조용히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