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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뵈브식 신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2)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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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여러 차례 “생트뵈브 식 발언”을 조롱하듯 언급한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묘사가 아니라, 프루스트가 문학과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비판이다.


생트뵈브는 19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비평가였다.

그의 비평 방식은 작가의 사생활과 성격, 가정사 같은 주변적 요소를 통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소설이나 시의 문학적 가치와 본질을 작품 자체에서 찾기보다, 작가의 사적 정보—연애, 정치 성향, 사회적 배경—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접근을 위험하다고 보았고, 『생트뵈브 반박』이라는 책까지 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생트뵈브식 판단은 인간과 예술을 실체가 아닌 겉모습으로 규정하는 태도였고, 본질을 보지 못하고 표피만 읽는 천박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비판은 문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 현실은 바로 이 “생트뵈브식 판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신앙, 사적 정보와 외적 조건으로 영적 가치를 가늠하는 태도, 표면의 경건으로 신앙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 이것은 프루스트가 경계했던 피상적 비평의 종교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생트뵈브식 판단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난 정보가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태도는 너무나 흔하다.

예를 들어, 이런 말투가 생트뵈브식이다.


“저 사람은 매일 새벽기도 나오니까 믿음이 좋지.”

“헌금 많이 하는 분이니까 믿음이 깊어.”

“그 사람은 교회에서 말도 없고 순종적이니까 영성이 있어.”

“겉으로는 거칠어도 속은 몰라, 그러니 신앙도 판단하지 마.”

“교회를 잘 다니니까 좋은 사람일 거야.”


이 표현들은 한결같이 겉으로 드러난 행위나 태도를 기준으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생트뵈브식 신앙은 판단의 기준이 오직 “보이는 것”에 있다.

기도하는 모습, 봉사하는 태도, 말투와 복장, 사회적 배경, 정치적 슬로건까지도 신앙의 잣대가 된다.

겉모습이 신앙의 깊이를 대변한다고 믿는 태도는 신앙을 본질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프루스트가 비판했던 생트뵈브식 판단의 가장 큰 문제는 ‘표면’이 ‘실체’를 설명한다고 오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표면이 아니다.

하나님도 표면이 아니다.

신앙은 더욱 표면이 아니다.


예수는 겉으로 드러난 경건보다 ‘속사람의 변화’를 보셨다.

바리새인이 금식하고 봉사하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이 깊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겉모습에 현혹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마 23:27)


겉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속은 썩고 죽어 있다는 뜻이다.


오늘 신앙 현실을 보면

생트뵈브식 판단은 오히려 교회 안의 권위와 힘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기독교의 진정성과 무관한 요소들이 신앙의 우열을 정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영적 권위를 결정한다.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본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면 ‘깨어 있는 성도’, 반대하면 ‘신앙이 불온한 이’라고 규정하는 태도는 생트뵈브식 판단의 극단이다. 겉모습이나 바깥 정보만으로 사람의 신앙을 재단하는 것은 프루스트가 가장 경계했던 ‘천박한 읽기’이다.


생트뵈브식 신앙의 또 다른 문제는 타인을 판단하기는 쉬워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도덕이나 경건을 근거로 자신의 신앙이 깊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멀어져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해서 본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앉아 많은 사람과 함께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가”를 보고 있었을 때조차

겉으로 드러나는 헌금 액수가 아니라 과부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겉보다 속을 보신다.

생트뵈브식 신앙은 이 핵심을 놓친다.


프루스트는 『생트뵈브 반박』에서

문학의 본질은 작가의 사생활이 아니라 작품 내부의 “내적 진실”에 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본질은 내 손에 쥔 헌금 봉투도 아니고, 입술로 외치는 고백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의 경건도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얼굴, 내적 변화, 은혜 속에서 깨어나는 마음,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자비의 감정, 자기를 속이지 않는 정직함에 있다.


겉모습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생트뵈브식 태도는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판단처럼 보이지만, 곧 사람을 줄 세우고, 영적 권력을 만들고, 가난한 이들의 신앙은 무시되고, 겉으로 화려한 사람들의 신앙이 칭송받는다. 그 속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조용히 사라진다.


생트뵈브식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겉으로 드러난 표면”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은 늘 내면이다.

고요한 기도 속,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 속,

내가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

은혜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겉모습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신앙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보는 신앙이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겉모습보다 더 복잡하고,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들이다.


프루스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참된 신앙은 “생트뵈브식으로 읽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겉이 아니라 깊이에서, 눈에 보이는 외적 요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혜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찾고 사람을 보는 신앙.


그것이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복음의 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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