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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을 잃어버린 인간의 초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4)

by 김민수

스완의 사랑과 자족을 잃어버린 인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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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스완의 사랑은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욕망의 구조, 그리고 자족(自足)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영적 상태를 가장 정교하게 해부한 한 편의 거울이다.


스완은 상류 사회의 품격과 문화적 풍요 가운데 살지만,

그 세계가 주는 기쁨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이미 가진 것들에는 놀라울 만큼 무감각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만을 강렬하게 욕망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결정적 통찰이다.


스완의 사랑은 오데트라는 여인을 향한 감정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오데트를 처음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교양도 부족하고, 상류 사회와도 거리가 있어 보였으며, 스완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스완은 왜 오데트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을까? 프루스트는 이 지점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결핍을 향해 움직이는 비밀을 드러낸다.

이미 가진 것에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익숙해진 은혜는 은혜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안의 빈자리, 결핍을 더 크게 느끼고,
그 결핍을 채워줄 것 같은 대상에게 더 강하게 끌린다.
스완이 오데트에게 빠진 이유는 그녀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스완에게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랑의 본질을 비추는 동시에 우리 신앙의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은혜에는 무뎌지고, 받지 못한 축복에는 과도하게 집착한다. 이미 믿는 하나님보다는 아직 체험하지 못한 기적에 더 마음이 쏠리고, 이미 주신 구원보다는 아직 받지 못한 응답만을 간절히 바란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결핍을 채워줄 것 같은 환상 속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변질되기 쉽다.


스완은 오데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그는 오데트에게 보티첼리 여인상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만든 환상을 투사했다. 스완이 사랑한 것은 오데트가 아니라, 오데트 위에 자신이 그린 이상화된 그림이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환상에 매달린다. 자신이 바라는 응답만 주는 하나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축복해주는 하나님, 내 편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상정한다. 이 환상은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다.


스완의 사랑은 결핍의 욕망에서 시작되었기에, 그에게 기쁨보다 불안이 더 컸다.

오데트가 어느 곳에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의심과 질투는 그의 사랑을 잠식했다. 스완은 사랑을 통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구속에 빠진다. 그는 사랑을 통해 치유받지 못하고, 사랑 때문에 병들어간다. 사랑이 타자를 향한 자유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소유하려는 불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인간이 자족의 능력을 상실했을 때 벌어지는 영적 붕괴와 닮았다.

자족을 잃은 인간은 늘 불안하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 같고,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인정받는 것이 불편하고, 다른 이의 행복이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불안은 감사와 기쁨을 삼키고, 관계를 병들게 하며, 신앙을 왜곡한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자족하기를 배우라.”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이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적 해방의 길이다.

인간은 결핍을 중심으로 욕망할 때, 관계도 신앙도 자신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은혜’에 눈뜨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욕망의 순환을 멈추고 자유를 회복한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완의 비극은 오데트를 사랑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이미 가진 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의 사랑은 결핍의 투사였고, 환상의 그림자였고, 자족을 잃어버린 인간의 초상이었다.

스완은 사랑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망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미 받은 은혜를 보는 눈을 잃어버리면, 기도는 결핍의 부르짖음이 되고, 사랑은 소유의 욕망이 되며, 공동체는 비교와 경쟁의 장소가 된다.


그러나 자족의 감각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미 주신 삶’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스완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가진 은혜를 보며 감사하는가, 아니면 갖지 못한 것만 욕망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 앞에서, 신앙인은 다시금 기도하게 된다.


“주여, 이미 주신 은혜를 보게 하소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결핍이 아니라 은혜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민음사의 번역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2- 마지막 편입니다.이어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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