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뒤랭의 작은 그룹과 한국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날카롭게 풍자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베르뒤랭 부인이다.
그녀가 이끄는 살롱, 이른바 “작은 그룹“(la petite église)”은 단순한 사교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공동체처럼 작동한다. 이 작은 공동체는 충성, 배제, 적대, 열등감과 허영이 뒤섞인 미묘한 집단 심리로 유지되며,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과도한 칭찬을 보내면서도, 동시에 외부 세계를 무조건 적으로 규정한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집단을 통해, ‘사교계의 속물성’이 아니라 ‘종교적 폐쇄성’ 그 자체를 풍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베르뒤랭의 구조가 오늘의 대한민국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 극단화, 반동성애운동의 과잉, 목회자 권위주의가 심화된 한국교회의 일부 집단에서는 이 구조가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베르뒤랭의 작은 그룹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 충성이다.
구성원은 베르뒤랭 부인의 취향, 판단, 기호에 무조건 동의해야 한다. 그녀의 의견과 어긋나는 순간, 그 사람은 “우리 그룹의 적”으로 배제된다. 놀랍게도 오늘의 한국 보수 근본주의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정 목회자, 특정 정치세력, 특정 신학적 해석에 동조하지 않으면 즉시 이단, 배교자, 혹은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신앙의 본질보다 충성의 태도를 더 중시하는 구조는 사실상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간 지도자 중심의 권위주의적 구조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기준이 된다.
두 번째 조건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다.
베르뒤랭 부인의 작은 교단은 귀족 사회나 다른 사교계·살롱을 적대시한다. 외부의 인정이나 기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외부 세계를 공격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한다. 한국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도 이런 구조는 익숙한 풍경이다. 진보 신학, 타 교단, 성소수자, 페미니즘, 인권 담론, 심지어 민주주의 운동까지 하나의 적대 대상으로 규정한다. 교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조차 “교회를 해치는 자”, “사탄의 도구” 등으로 비난한다. 외부 비판을 수용하는 대신, 적대와 음모론으로 방어하는 구조는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세 번째 특징은 상호 칭찬과 집단적 자기도취다.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칭찬해주어야 한다. 그녀의 음악적 취향에 맞는 연주가가 오면 성인(聖人)처럼 추켜세우고, 새로운 구성원도 그녀가 좋아하는 인물이라면 곧바로 찬양의 대상이 된다. 이 상호 칭찬은 구성원에게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우월감을 심어준다.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에서도 비슷한 행태가 반복된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지킨다”, “우리가 진짜 복음을 붙들고 있다”, “우리가 시대의 남은 자다” 같은 언어는 공동체 내부의 우월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타 교회나 사회 전체를 타락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종교적 내셔널리즘과 엘리트주의다.
네 번째는 지도자에 대한 광적 의존이다.
베르뒤랭 부인은 마치 교주처럼 중심에 군림한다. 그녀의 기분, 판단, 감정이 그룹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특정 유명 목사, 특정 정치지도자, 유튜브 강경 보수를 향한 맹목적 충성이 신앙의 기준이 된다. 심지어 그들의 말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지기도 한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 숭배의 구조, 종교적 카리스마에 포획된 집단 심리다. 신앙은 자유와 해방의 언어인데, 이 구조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도구가 된다.
다섯 번째 특징은 감정적 의존과 정서적 억압이다.
베르뒤랭의 사교 모임에서는 구성원들이 그녀의 인정에 의존한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끼고, 소속감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자기 생각을 감춘 채 분위기에만 맞춘다. 한국 보수 근본주의에서도 지도자의 승인과 단체의 분위기에 정서적으로 종속되는 이들이 많다. “목사님 말씀을 거스르면 시험 든 것이다”, “기도 안 하면 사탄에게 잡힌다”, “다르게 해석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다”라는 말들은 구성원을 억압하면서도, 동시에 지도자에게 더욱 의존하게 만든다. 이는 영적 성장과는 거리가 먼, 영적 가스라이팅의 구조다.
여섯 번째는 선택받은 소수라는 신화다.
베르뒤랭의 교단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특별한 공동체로 여긴다. 그들은 귀족 사회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예술적이며, 더 뛰어나다고 믿는다.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도 “우리는 시대의 남은 자”,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소수의 엘리트”, “한국을 살릴 유일한 교회”라는 선택 신화를 반복한다. 이는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교만한 종교적 자아도취다. 선택은 책임을 부르는 언어인데도, 이들은 선택을 특권으로 사용한다.
이 모든 구조는 프루스트가 묘사한 베르뒤랭의 작은 교단과 어쩌면 너무도 닮아 있다. 배타성과 우월감, 지도자 중심주의와 에코 챔버 구조, 타자에 대한 적대, 내부의 경쟁과 외부를 향한 경멸—이것은 문학 속 풍자일 뿐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특히 반동성애 운동으로 대표되는 일부 보수 근본주의 집단은 ‘진리 수호’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공격하고, 배제하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들의 언어는 성경의 언어가 아니라, 두려움과 정치적 욕망이 뒤섞인 종교적 증오의 언어다.
프루스트는 베르뒤랭의 작은 그룹을 통해 인간이 작은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쉽게 폐쇄성과 오만에 빠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공동체는 실제로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구성원들은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한 세계’라고 착각한다.
오늘의 한국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 문학적 풍자의 생생한 현실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런 폐쇄성과 배제의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 약자 보호와 평화의 길 속에서 드러난다. 베르뒤랭의 교단 같은 공동체는 주님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문학의 거울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비추어야 한다. “작은 교단”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복음의 열린 길로 돌아가는 것—그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