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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 중심으로

by 김민수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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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이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인간의 비참함을 기록한 장대한 서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사랑의 복음을 노래한 책이다. 다만 위고가 말하는 “구원”은 교리적 구원이라기보다, 인간 안의 선한 가능성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능력을 가리킨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대작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장발장—사랑이 인간을 다시 만든다.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 즉 성경이 말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시 142편의 다윗처럼)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꾸는 이는 교리나 법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무조건적 은총이다. 은촛대의 상징은 그를 ‘도둑에서 형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패턴과도 닮아 있다. 죄를 드러내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의 방식이다. 장발장은 “저도 이제 형제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 대목은 “회개와 변화"라는 주제를 묵상하게 한다.

회개란 죄를 돌아보아 고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개와 변화는 한 짝이다.

그러나 요즘의 신앙인들은 돌아보기는 하지만(회), 변화되지(개)는 않는다.

눈물콧물 흘리며 두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지만, 자기의 평안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행위에 불과한 요식행위를 신앙적인 행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진정한 회개와 변화는 성직자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위고는 단호히 말한다.

사람을 바꾸는 힘은 심판이 아니라, 심판을 건너뛰는 사랑이다.



2. 자베르—율법은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끝내 추적하는 경찰이자 율법주의의 상징이다. 그는 ‘법은 절대’라고 믿는다. 그러나 장발장의 자비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자베르는 무너진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는 “사랑이 스며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예수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닮지 못하는 이들이 겪는 내적 붕괴와도 유사하다.

법은 질서를 만들지만 구원을 만들지 못한다.

자베르의 파국은 오늘날의 성직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율법(문자)을 지키게 하고 있는가?”


율법(문자)은 필요하지만, 율법만으로는 공동체도, 한 인간의 영혼도 살아나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문자는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문자에 사로잡혀 있다.

실천은 없고, 언어의 유희만 난무한다.

이것은 비단 개신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다.



3. 판틴—사회의 죄가 개인에게 흘러들어가는 방식


판틴은 가난과 편견에 의해 서서히 파괴된 여성이다.

그녀의 타락은 ‘도덕적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결과다.

위고는 판틴을 통해 개인의 죄가 아니라 사회의 죄를 고발한다.


판틴의 몰락은 현대 사회의 약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현실은

정치적 혐오와 경제적 불평등, 노동의 불안정 등으로 오늘의 ‘판틴들’을 수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고자 해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자 해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자기 앞에 놓인 사다리는 자기가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아니다.

너무 높거나 부실해서, 사다리를 오르려하는 순간 구조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방치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뿐 아니라,

그들을 향해 실패자로 낙인을 찍고, 스스로도 실패자로 인식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구조적인 폭력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통 앞에서 장발장이 보여준 태도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책임이다.


“판틴, 나는 그대를 구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장발장은 그녀의 딸 코제트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건다.

이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에 대한 보상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책임의 논리이다.

그렇다.

구조적인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4. 코제트와 마리우스—사랑이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방식


코제트는 비참함 속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장발장의 사랑을 통해 새로운 미래로 건너간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마리우스와의 만남)는 다소 로맨틱하게 보일지 몰라도, 위고가 강조한 핵심은 ‘구원의 세대 간 전달’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장발장의 사랑이 코제트를 살렸듯, 한 세대의 헌신이 다음 세대의 영혼을 일으킨다.

사랑은 기록되지 않아도, 다음 세대의 형태로 남는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세대를 넘어 이어질만한 종교가 있는가?

아마도 대종교라고 불리는 종교는 세대를 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가?

종교는 그렇게 이어질만한 가치가 있지만, 오늘의 종교는 과연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게 되길 바란다.



5. 혁명과 민중—정의는 사랑 없이 완성될 수 없다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앙졸라를 포함한)은 정의를 갈망한다. 그러나 위고는 냉정하게 묻는다.


“혁명은 사랑을 품지 못한다면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이들의 죽음은 정의가 사랑 없이 실행될 때 어떤 비극이 오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서의 평화’이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은 경쟁하는 두 가치가 아니라, 반드시 결합되어야 하는 두 날개다.


장발장의 죽음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자기를 숨기면서까지 타인을 살렸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는 두 개의 촛대가 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빛을 비추어 준 증거다.”


위고는 말한다.

하나의 은총이 한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살리며, 결국에는 사회 전체가 변한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레 미제라블』은 문학의 옷을 빌린 “은총의 신학서”라고 할 수 있다.



6. 목회적 통찰: 죄보다 큰 것은 사랑이다


장발장–자베르–판틴–코제트–혁명가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 책은 인간의 비참함을 기록한 동시에, 비참함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을 증언한다.

위고는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도, 주교의 모습에서 가장 강렬한 복음의 빛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발장은 “사랑이 존재를 새롭게 한다”는 신학적 진리를 몸으로 증언한다.


목회자로서 이 작품을 읽는 일은, 단지 문학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신뢰를 다시 배우는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교인들도, 주교가 장발장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보면 모두 “은총이 스며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레 미제라블』은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 끝난다.


“가장 어두운 밤도 새벽을 막지 못한다.”


장발장의 삶처럼, 한 사람의 변화는 미미해 보이지만, 사랑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한 세상은 여전히 희망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문학은 종종 신학이 미처 닿지 못한 자리까지 도달하며, 인간의 비참함을 껴안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춘다.


참으로 위대한 책이고, 그리하여 '불쌍한 사람들'의 삶은 이 시대를 가는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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