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자를 찾아 강으로 흐르다
“만약 유일자, 가장 중요한 존재,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젊은이였다.
경전의 언어를 통달했고, 제사 의식도 완벽히 익혔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공허함을 느낀다.
“나는 모든 것을 알지만, 유일자를 알지 못한다.”
그의 문제는 단순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었다.
유일자, 곧 존재의 근원을 향한 갈망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이라 부르든, ‘참된 실재’라 부르든, 유일자를 알고자 하는 존재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분은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로 ‘알아지는’ 분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형식을 떠난다.
“나는 부처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겠다.”
이 말은 반역이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참된 믿음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말씀하셨다.
싯다르타는 수도자들과 함께 금욕의 길을 걸으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마음을 비우려 한다.
그러나 그 길에서도 유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그는 도시로 내려가 쾌락과 부를 경험한다.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 돈과 향락, 권력의 달콤함….
그러나 이 모든 것 역시 허망함으로 끝난다.
그때 싯다르타는 깊은 절망 속에서 강가에 앉는다.
모든 것을 잃은 그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는 깨닫는다.
“사물의 의미와 본질은 사물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삶라만상 속에 있다.”
이 문장은 헤세의 세계관을 꿰뚫는다.
싯다르타가 찾던 유일자는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 안에, 생명 안에, 지금 여기에 있었다.
이것은 범재신론(panentheism,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나님)과 깊이 닿아 있다.
‘하나님은 만물 속에 내재하시면서도 만물을 초월하신다.’
이는 성서적 사유와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행 17:28).
하나님은 하늘 위의 신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숨 쉬시는 분이다.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다.
싯다르타는 설교를 듣지 않고, 스승을 따르지 않고, 강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진리에 도달한다.
그에게 강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신의 목소리다.
강은 한없이 흐르지만 사라지지 않고, 모든 물결이 다르지만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그 흐름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이 깨달음은 중요한 통찰을 준다.
우리는 종종 ‘유일자’를 저 멀리 있는 존재, 인간의 세계와 단절된 절대자로 상상한다.
그러나 성육신의 신비는 그 반대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신성과 인성의 만남이다.
그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는 선언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에 내재된 신의 형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헤세는 이런 신비를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다.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노인 바수데바와 함께 배를 젓는 장면은 목회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바수데바는 말이 적은 인물이다. 그는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강의 소리를 들으라.”
그 말은 곧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라”는 성서의 음성과 다르지 않다.
지혜는 말 속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자란다.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은 ‘듣는 존재’로의 변화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저 듣고, 흘러간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이기도 하다. 믿음의 길은 ‘말하는 자리’에서 ‘듣는 자리’로 옮겨간다.
기독교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다.
말로 가득한 시대에, 교회는 ‘설명하는 신앙’에서 ‘경청하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강의 침묵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던 싯다르타처럼, 우리는 존재의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의 친구 고빈다가 마지막에 싯다르타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부처인가, 현자인가?”
싯다르타는 미소 짓는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얼굴이 겹쳐진다.
어머니, 아이, 성자, 죄인, 짐승, 신….
그때 고빈다는 갑자기 깨닫는다.
모든 존재는 서로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인간 안에, 인간은 신 안에 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싯다르타』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영혼의 복음서’다.
헤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그리고 있다.
그 길은 배움이 아니라 ‘잊음’의 길이며, 축적이 아니라 ‘비움’의 길이다.
유일자는 그 끝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다.
“강은 웃고, 강은 노래하고, 강은 잠잠하다.”
그 물소리 속에 모든 생명이 숨 쉬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성직자의 사명을 다시 떠올린다.
교인은 교리로 구원받지 않는다.
구원은 관계의 신비 속에서 일어난다.
성직자는 사람들을 강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직접 강의 소리를 듣도록, 자기 안의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다.
‘유일자’를 알게하는 것은 특정한 교리를 암송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처럼 흐르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도록 돕는 일이다.
사물의 본질이 사물 속에 있듯, 하나님 나라도 우리 안에 있다.
그분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흐르고 계신 분이다.
하지만, 성직자 자신도, 유일자를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자기의 소리가 아니라 '강의 소리'를 들으라 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싯다르타』가 성직자에게, 그리고 믿음의 여정을 걷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