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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데미안>

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소통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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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보여주는 영혼의 기록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한 소년의 이름이지만, 사실상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질서와 혼돈 사이를 오가며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무엇’을 따라 살아보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끊임없이 가로막는다.


교회가 가르친 선의 세계는 안전했지만,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 없었다.

반면 금지된 세계는 두려웠으나 진실성을 담보하는 것을 보였다.


결국 싱클레어가 선택한 길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깊은 목소리에 응답하는 길이었다.

그는 그 길을 통해 ‘신앙’이란 외부의 율법이 아니라, 내면의 부름을 따라 사는 용기라는 사실을 배운다.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네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신앙인에게도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종종 ‘나’로 존재하기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신앙인의 틀 속에 머문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시작은 바로 그 틀을 깨는 데 있다. ‘알을 깨고 나온다’는 상징은 그래서 단순히 청춘의 자각이 아니라, 영적 탄생의 은유이다.

알은 보호막이자 감옥이다.

거기서 나오려면 죽음 같은 아픔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죽음같은 아픔은 자크 라캉의 '쥬이상스(jouissance)'와 맞닿는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하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에 이를 수 없듯,

자기 내면의 껍질을 깨뜨리지 않고는 ‘하나님 안에서의 나’를 만날 수 없다.



헤세는 또 이렇게 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이 문장은 그의 세계관을 함축한다.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창조의 뜻을 함께 이루어가는 능동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통해 자기의 뜻을 펼치신다.

따라서 ‘한 사람’은 우연히 존재하는 조각이 아니라, 창조의 큰 그림 속에 필수적인 색점(色點)이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하찮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성서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존재 안에도 유효하다.

그가 실패하든, 흔들리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연결되어 있으며, 내가 인식하지 못해도 그와 나는 우주라는 하나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교회의 가장 큰 소명이 바로 이 “한 사람의 존귀함”을 지켜내는 일임을 다시 깨닫는다. 신앙 공동체가 자칫 ‘의로운 사람들의 집단’으로 자신을 규정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개별 인간의 복잡한 삶은 쉽게 판단받고 배제된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앞장서는 보수를 푭장하는 개신교를 보면 "한 사람의 존귀함"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무슨 교회라고, 사랑을 이야기하는지 의아하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존재에도 무한히 주목하신다.

그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든지,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 삶을 통해 어떤 진실을 드러내려 하신다. 그러므로 목회는 결국 ‘정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그것이 곧 신앙의 자유이며, 은총의 실현이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경험하는 고독과 방황은, 신앙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과도 닮았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한다.

이 갈등은 죄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징표다.

신앙이란 욕망을 억누르는 도덕적 통제가 아니라, 욕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의 순례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롬 7:19)고 고백했을 때, 그는 이미 그 갈등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피안의 하나님만을 찾으면서, 하나님 없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지속적으로 나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한다. 놓아버리지 않는다.


헤세가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고 쓴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 안에는 늘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교회가 나를 이해해 줄까, 하나님조차 나를 꾸짖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심어주신 ‘나됨’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비틀리고 불완전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경이롭다”는 고백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아직도 진행 중임을 믿는 눈에서 나온다.


싱클레어의 여정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더 이상 데미안의 그림자를 좇지 않는다.

데미안은 이제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그를 이끄는 목소리로 남는다.


신앙의 여정도 같다.

우리는 처음엔 외부의 권위—교회, 교리, 목사, 전통—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지만, 결국에는 자기 내면의 깊은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구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신앙’이 자란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서의 존엄을 회복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른 이들은 많지 않다. 자기의 내면에 자리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자기 내면에는 부재한다 믿고, 피안에는 부재하시는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 안에 계신다.


『데미안』을 읽으며 나는 자주 “예수의 길”을 떠올린다.

그분은 당시의 종교적 권위와 질서 속에서 늘 ‘자기 자신으로’ 사셨다.

율법보다 사람을 보셨고, 교리보다 생명을 선택하셨다.

그분의 생애는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따라 산 인간의 완성된 모습이었다.

그 길이 외롭고 고난스러웠지만, 그 길을 통해 인류는 구원의 빛을 보았다.

신앙이란 바로 그런 삶의 용기를 배우는 일이다.


결국 『데미안』은 청춘의 성장소설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 속에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신앙이 죄의식이나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자유와 고유한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서로를 “경이로운 존재”로 바라볼 때, 그곳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싹튼다.

그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

한 사람의 내면이 깨어나고, 자기 속의 신성을 믿기 시작할 때—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로부터 시작되고, 너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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