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비 딕』과 『요나서』

바다 위의 두 인간

by 김민수


9791139707137.jpg



인간은 바다 앞에서 언제나 작아진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와 어둠, 예측할 수 없는 파도는 인간의 한계와 신의 신비를 동시에 드러낸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성서의 『요나서』는 모두 바다를 무대로, 인간이 신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쪽은 회개의 서사이고, 다른 한쪽은 도전과 파멸의 서사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나 도망쳤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향한 그는, 결국 풍랑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바다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 바다는 그를 삼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 그를 살려내시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고 기도한다. 바다는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회개의 장소가 되었고, 물고기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의 통로가 되었다.


반면 『모비 딕』의 에이해브는 신을 향한 복수심으로 바다에 나선다.

그에게 흰 고래 모비딕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불구로 만든 존재이자, 세상의 악, 그리고 신 그 자체다. 그는 고래를 잡아 죽임으로써 신비와 운명을 정복하려 한다. 그러나 멜빌이 그린 바다는 인간의 의지로는 건널 수 없는 세계이며, 고래는 이해될 수 없는 절대자의 형상이다. 요나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지만, 멜빌의 신은 침묵하신다. 요나가 들은 음성을 에이해브는 듣지 못한다. 그는 신의 부재 속에서 신이 되려다, 결국 그 신의 침묵 속으로 삼켜진다.


요나서에서의 바다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피조세계다. 풍랑조차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멜빌의 바다는 무한하고 비인격적인 공간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방향을 잃고, 신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요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만, 에이해브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거부한다. 두 인물의 여정은 방향이 정반대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다 순종으로 나아가고, 에이해브는 신의 뜻을 찾으려다 신을 대적한다.


흥미롭게도 두 이야기 모두 ‘삼킴’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요나는 물고기에게 삼켜져 생명을 얻고, 에이해브는 고래와의 싸움 속에서 바다에 삼켜져 죽음을 맞는다. 하나는 구원의 삼킴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삼킴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에이해브는 신의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같은 바다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택한 태도에 따라 운명은 갈라진다.


『요나서』의 중심에는 자비가 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벌하지 않고 다시 부르신다. 니느웨의 악을 심판하지 않고 회개를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분노보다 크고, 요나의 계산보다 깊다. 반면 『모비 딕』의 세계는 자비가 부재한 세계다. 고래는 설명되지 않으며, 신은 침묵한다. 멜빌은 그 침묵 속에서 인간의 오만을 비춘다. 신의 자리를 넘보는 인간,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이 결국 얼마나 허망한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요나와 에이해브, 두 사람 모두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반면, 에이해브는 바다의 심연으로 사라졌다. 요나는 회개함으로 살았고, 에이해브는 집착함으로 죽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 이스마엘만이 남는다. 그는 파선된 배 위에서 홀로 살아남아 “Call me Ishmael.”이라 말한다. 모비딕의 첫 문장은 아주 강렬하다. 첫 문장은 그 책의 모든 주제를 관통한다.


그는 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지 증언자로 남는다. 마치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 요나처럼, 바다를 통과한 자만이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다. 하지만, 옮긴이 이종인의 해제를 의하면 '흰고래는 신이 지상에 내려보낸 시련 혹은 '고래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다(P.714).

요나서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다. 반면 『모비 딕』의 신은 침묵 속의 신, 불가해한 절대자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같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넘을 수 없으며, 그 앞에 선 존재로서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나는 그 겸허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에이해브는 그렇지 않음으로것을 잃음으로 파멸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요나는 끝내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해 섭섭해 하니 파멸이고,
에이헤브선장은 죽음에 이르렀지만 파멸이 아니라 구원이 아닐까?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신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요나는 그 질문 앞에 무릎 꿇고, 에이해브는 창을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바다 속에서 신의 신비를 만났다. 한쪽은 자비의 빛으로, 다른 한쪽은 침묵의 어둠으로. 하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인간은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요나의 물고기와 멜빌의 고래는 모두 말한다.


“너는 피조물이다. 네가 신이 아니다.”


바다는 언제나 인간을 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살려내셨고, 멜빌은 이스마엘을 남겨 두었다.


그 살아남은 자의 고백,

그것이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가 길잡이가 되듯, 이 세상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리라.


keyword
이전 21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