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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1)

환상의 사랑, 진실한 신앙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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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이렇듯 여러 기쁨 속에서, 그 사랑을 정당화해 주고 사랑의 지속을 보장해 주는 증거를 필요로 하므로(반대로 기쁨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랑과 더불어 끝난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 2부 스완의 사랑.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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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는 사랑의 미학을 넘어 인간의 신앙 구조를 성찰하게 만든다. 처음 오데트를 보았을 때 스완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뱅퇴유의 소나타 한 악절과 오데트의 표정이 결합되며,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이 찾아왔다. 그리고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인의 얼굴에서 오데트의 형상을 발견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여인이 아닌 예술적 상징으로 떠오른다. 이때 스완의 사랑은 현실의 여인이 아니라, 예술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시작된다. 그는 오데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속에 그려 넣은 ‘오데트라는 이미지’를 사랑한 것이다.


스완에게는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

"그에겐 대가들의 그림에서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보편적인 특징뿐 아니라, 반대로 보편적인 것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 즉 우리가 아는 얼굴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거장들의 그림 속에서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p.69]


그는 자신의 특이한 취향으로 인해 오데트를 사랑하게 된다.

프루스트는 스완의 사랑을 통해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서 얼마나 쉽게 자기 욕망을 신성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안에 숨은 결핍과 환상을 투사하는 행위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사랑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오데트가 실제로는 속물적이고 교양 없는 여인이었음에도, 스완은 그 사실을 끝내 외면한다. 그에게 오데트는 현실의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담아낸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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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구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 이미지’를 믿고 있을 때가 많다. 하나님을 나의 기대, 나의 소망, 나의 필요에 맞춰 해석하고, 그 안에서만 그분을 경험하려 한다. 처음 신앙을 시작할 때의 감동, 기적의 순간, 찬양 속 눈물은 우리 안의 감각을 깨우지만, 그 감동은 오히려 하나님을 ‘나의 감정 속 존재’로 제한할 위험을 안고 있다. 스완이 오데트를 예술의 언어로 포장하듯, 우리 역시 하나님을 자신의 바람과 감정으로 덧칠한 우상으로 만들 때가 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분이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과오를 신앙으로 합리화하는 모습은,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하며 현실을 외면한 방식과 닮아 있다. 스완이 오데트의 결점을 보지 않으려 했듯,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보다 신앙의 언어로 덮어버린다. 결국 두 경우 모두 진실을 직면하지 못한 채, 환상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믿음에 머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신앙이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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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는 오데트를 향한 불안과 의심에 시달렸다. 그녀의 과거를 캐묻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상상에 괴로워하며, 결국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했다. 프루스트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심과 불안으로 유지되는 집착의 구조임을 보여준다. 사랑의 본질은 타인을 향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결핍을 향한 갈망이라는 것이다. 스완은 오데트를 잃을까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이 오히려 사랑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사랑 속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에 갇힌다.


스토커적 사랑은 사랑의 형태를 띠지만, 그 본질은 타인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은 ‘너를 사랑한다’가 아니라, ‘너를 내 안에 가두겠다’는 말로 변질된 사랑이다.

결국 이런 사랑은 타인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감옥일 뿐이며, 스완처럼 그 안에서 자신까지 갇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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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 때로는 이런 고통의 과정을 통과한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믿음의 이유를 잃어버린 듯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며, 하나님께 실망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속에 숨어 있던 ‘환상의 하나님’을 무너뜨리신다. 응답을 주는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 내 편에 서주는 하나님—그 모든 이미지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투사일 뿐이다. 그 환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셔도, 그저 ‘계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이 드러나는 때다.


기도의 열심이 곧 믿음의 깊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관계가 아니라, 자기 의로움의 증거가 될 때, 그 기도는 사랑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매일 새벽을 깨워 무릎을 꿇지만, 그 마음에 타인을 판단하고 조롱하는 말이 자리한다면, 그는 스완처럼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신앙의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우월감의 회로 속에서 맴도는 독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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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은 오데트의 실체를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야 사랑의 진실을 이해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것은 결국 오데트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였음을 고백한다. 사랑의 기쁨도, 그 고통도 모두 자기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만든 환상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 사랑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소유가 아닌 이해이며, 욕망이 아닌 수용이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내 욕망의 대상으로 삼던 시기가 지나야,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배운다.


환상의 사랑은 결국 붕괴한다.

그러나 그 붕괴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스완이 환상의 오데트를 잃고 나서야 사랑의 본질을 깨달았듯, 신앙인도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한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의 여정은 환상을 통과하는 고통이며,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스완이 사랑의 절망 속에서 자신을 깨닫듯, 우리 역시 믿음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다.


프루스트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파헤쳤지만, 그 이야기는 신앙의 언어로도 깊이 번역된다.

사랑은 언제나 환상으로 시작하지만, 진실은 그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난다.

환상의 사랑이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듯, 진실한 신앙은 그 연약함을 껴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낸 이상 속에 계시지 않고, 오히려 환상이 무너진 자리—슬픔과 의심, 침묵과 상실의 한가운데—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스완의 사랑이 그러했듯, 신앙도 결국 자신이 만든 환상의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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