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고통을 껴안는 신앙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방대한 책은 단 한 번의 독후감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심오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프루스트의 책은 중요한 주제나 묵상의 연결점이 이어질 때마다 다룰 것 같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에는 인간의 연민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당한 불행을 신문에서 읽을 때면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도, 그 불행의 대상이 조금이라도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면 눈물은 금세 말라버린다.”
멀리 있는 고통에는 쉽게 눈물 흘리지만, 가까운 고통 앞에서는 마음이 굳어지는 인간의 역설이다. 신문 속 전쟁 뉴스에는 마음 아파하면서, 정작 옆집 이웃이나 가족의 고통에는 무심할 수 있다. 가까운 고통은 일회성 연민이 아니라, 지속적인 돌봄과 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훨씬 더 힘겹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공감(sympathy)은 멀리 있는 고통을 이상화하고, 가까운 고통은 무겁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멀리 있는 이웃은 추상적 타자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감정의 부담이 덜하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의 아픔은 내 삶에 개입하고 나의 일상을 흔든다. 그래서 “가까운 자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삶을 바꾸라는 근본적 명령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의 질문, “누가 내 이웃입니까?”에 답하시며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 지점을 겨냥한다. 이웃은 내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그 순간에 내가 이웃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도 『나를 따르라』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가까운 자리,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향해 있다”고 말했다. 멀리 있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가까운 이의 상처에 손을 대는 순간 내 삶은 변화를 요구받는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을 떠올리면,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외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차츰 무뎌졌고, 유가족들의 절규는 종종 불편한 소리로 취급되었다. 멀리서 본 세월호는 국가적 비극이었지만, 가까이서 만난 유가족들의 아픔은 “지속적으로 돌봐야 할 고통”이 되었고, 그 무게 앞에서 사회는 쉽게 등을 돌렸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젊은 생명이 거리에서 쓰러졌을 때,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차갑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언론의 카메라가 사라진 뒤에도,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계속되었지만, 사회는 그 가까운 고통을 껴안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지적한 연민의 역설이다. 우리는 멀리 있는 고통에는 쉽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까운 고통—특히 나의 안위와 일상을 흔드는 고통—앞에서는 냉정해진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서 그 모순을 뼈아프게 드러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라고 외쳤다. 정의 없는 연민은 값싼 감상에 불과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까운 고통을 끝까지 껴안는 지속적인 헌신이다.
물론 권력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웃이다. 그러나 권력자를 향한 사랑은 피해자의 고통을 덮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직면하게 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 약자에게는 위로와 연대가, 강자에게는 회개와 책임이 이웃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교회는 오히려 권력자와 강자의 편이 되어 그들의 욕망을 돕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그 불법한 일들이 드러나자 '종교 핍박'운운하고 있으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프루스트가 말한 연민의 역설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시험한다. 멀리 있는 고통에는 쉽게 눈물 흘리면서, 정작 가까운 교인과 가족,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눈물에는 무심하거나 차갑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니다.
세월호와 이태원은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멀리 있는 비극에만 감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가까운 고통을 지속적으로 껴안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웃 사랑의 길이며, 오늘 한국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자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