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제국을 마주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표면적으로는 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과 세계의 구조를 꿰뚫는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사랑, 욕망, 가난, 인종, 계급, 가족,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처.
이 모든 것들이 한 문장 속에 뒤엉켜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내던지듯 글을 쓴다.
그래서 결국, 『연인』은 단순히 한 여성의 고백이 아니라, 자기 안에 스며든 제국의 언어와 싸우는 영혼의 기록이 되었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금의 베트남 사이공이며,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청년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러나 단순한 로맨스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들은 식민지 사회가 만들어낸 지배와 피지배의 은밀한 반복, 욕망과 수치의 교차점과 관계하고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자유를 얻고 싶었지만, 그 사랑이 곧 속박이 되었다. 그녀의 몸은 사랑을 통해 해방되었으나, 그 사랑의 구조는 이미 제국의 질서 속에 놓여 있었다. 뒤라스는 그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녀였다.
소설의 첫 문장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쭈그러진 얼굴’은 단순한 외모의 묘사가 아니다.
그건 세상의 어둠을 다 알아버린 영혼의 표정이다. 그 얼굴은 어린 나이에 겪은 가난, 어머니의 절망과 오빠의 폭력, 식민지 사회의 모멸과 차별이 모두 새겨진 이력서다. 그녀는 너무 일찍 세상의 질서를 이해했고, 그 질서가 결코 정의롭지 않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그래서 늙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표현하는 ‘늙음’은 생리적 시간이 아니라, 영혼의 시간이다.
그녀는 쭈그러든 노인의 얼굴로 글을 쓴다.
기억의 강, 메콩강을 건너며 사랑과 죽음, 욕망과 회한이 얽힌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자신을 새로 쓰는 행위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곧 상처를 다시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때의 나’를 다시 불러낸다. 그 기억에 직면해야만, 자신 안에 남은 제국의 흔적,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뒤라스의 글에서 ‘큰오빠’는 가장 모순된 존재다.
그는 게으르고 폭력적이며, 어머니에게 기생하며 여동생을 괴롭힌다.
그러나 뒤라스는 단 한 번도 그를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는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연민한다.
그의 큰오빠는 는 사랑받지 못한 인간의 초상, 식민지 사회의 무력한 가부장, 그리고 제국주의의 내면화된 얼굴이다. 오빠는 지배자의 언어를 흉내 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남자다. 그의 분노는 사회를 향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향한다. 그는 억압받은 자가 또 다른 억압자가 되는 인간의 슬픈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큰오빠를 죽이고 싶고,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이겨보고 싶고,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뒤라스는 가족간의 이런 관계를 통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구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녀의 미움은 단순한 가족 간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 안의 제국적 속성에 대한 증오였다.
그녀는 오빠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미워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도 제국의 속성이 내재해 있었기 ㄸ때문이엇다. “나는 그를 닮았다”는 고백 속에는, 자신 안에 스며든 폭력의 질서를 자각하는 통증이 담겨 있다.
뒤라스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자기 구원의 통로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프랑스어라는 제국의 언어로 글을 쓰지만, 그 언어를 다시 뒤틀어 제국을 해체한다. 그녀의 문장은 짧고 불안정하며, 논리보다 리듬으로 움직인다. 문법은 부서지고, 감정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그건 폭력의 언어를 부수는 행위다.
제국의 언어, 남성적 질서의 언어를 해제함으로 제국의 폭력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파편적인 문장은 기도처럼 들린다.
말이 끝나지 못하고, 침묵으로 떨어지는 부분마다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숨어 있다.
그녀의 글쓰기는 말하자면, 신 없는 기도다.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 않지만, 그 부재 속에서 진실의 빛을 찾는 몸부림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연인』은 '회개의 서사'다.
뒤라스가 싸우는 제국은 외부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스며든 죄의 구조다. 자기가 그토록 증오하는 지배하려는 마음, 우월감, 욕망, 수치, 폭력,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내면에 뿌리내린 ‘식민성’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롬 7:22–23)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뒤라스 역시 자신 안의 제국과 싸운다.
그녀의 글은 완전한 해방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건 끊임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신학적 언어로 바꾼다면, 그녀의 여정은 ‘성화의 과정’이다.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의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걷는 여정.
그게 뒤라스의 문학적 구원이다.
그녀의 ‘늙은 얼굴’은 세상의 어둠을 알아버린 자의 얼굴이자, 자기 안의 어둠을 자각한 자의 표정이다.
그 자각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첫 걸음이다. 믿음이란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갖는 일이며, 그 눈은 언제나 ‘당연함’을 의심하는 데서 열린다.
나는 『연인』을 읽으며 오래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2001년, 9·11 테러가 나던 해였다. 3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며, ‘킬링필드’와 프놈펜 인근의 쓰레기 매립장도 방문했었다. 킬링필드 추모탑에 전시된 수천 개의 해골과 들판 곳곳의 구덩이들, 아직도 듬성듬성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옷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천들, 질회에 다리를 잃고 구걸하는 걸인들.....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링필드의 들판에 피어난 들꽃들, 그 들꽃들의 평화로움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킬링 필드 근처의 쓰레기 매립장에서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뒤지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아이들이 연기 속에서 플라스틱을 줍고, 여인들은 역겨운 쓰레기 냄새 속에서 밥을 지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과거의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제국의 구조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칼과 총은 사라졌지만, 가난과 불평등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제국주의는 바게뜨 빵처럼 내면으로 파고들어 제국은 사라졌지만, 또다른 권력이 그들을 제국보다 더 가혹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은 ‘침묵의 킬링필드’였다.
그때의 기억은 『연인』 속 세상과 닮아 있었다.
식민의 잔재, 제국의 경제 구조, 불법과 부패, 그 위에서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이용하고 지배한다.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제국의 흔적을 보았다.
나는 뒤라스의 문장을 통해, 그 제국이 바로 나 자신 안에도 있음을 깨달았다.
뒤라스는 신을 부르지 않지만, 그녀의 글은 신학적 언어를 닮아 있다.
그녀는 죄를 고백하고, 상처를 드러내며,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침묵 속에서 스스로 진실을 향해 걸어가는 ‘영혼의 순례’다.
『연인』의 마지막에는 명확한 해답이 없다.
사랑은 끝나고, 기억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견디는 침묵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변한다.
그 변화는 완성되지 않은 구원이지만,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그래서 소설 초입의 문장이 결론처럼 와닿는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연인』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신앙이란, 세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눈이다.
사랑, 권력, 가난, 폭력 — 그 모든 ‘당연한 질서’를 의심하는 것.
뒤라스는 문학으로 그 일을 했다.
우리는 신앙으로 그 일을 한다.
그녀의 글은 신이 없는 시대의 고백이지만, 그 고백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침묵을 기다리는 영혼의 떨림이 있다. 그녀가 사랑을 통해 인간의 어둠을 말할 때, 나는 신앙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본다.
그녀는 글로 싸웠고, 나는 말씀으로 싸운다.
그러나 싸움의 본질은 같다.
자기 안의 제국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빛과 자비, 그리고 새로운 눈을 세우는 일.
『연인』은 그래서 단지 문학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둠을 통과해 빛을 배워가는 여정의 증언이다.
그 빛은 멀리 있지만, 그녀의 문장과 우리의 믿음은 그 빛이 여전히 세상을 향해 오고 있음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