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와 현존 사이의 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 문학의 가장 유명한 질문 중 하나를 남겼다.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인물은 이유도 모른 채 ‘고도(Godot)’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내일을 기다리고, 내일은 다시 오늘이 된다.
이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관객은 묻는다. 고도는 누구인가?
많은 독자들은 이 이름 속에서 God(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특히 독일어 Gott와의 유사성은 ‘고도=하느님’이라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불러왔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인간”이라는 상징 말이다. 그러나 베케트 자신은 단호했다. “고도는 하느님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적 해석을 거부했고, 작품을 신앙의 은유로 읽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케트는 신의 부재를 노래한 사람이 아니라, 신이 침묵한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인간의 실존을 그린 작가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자의 말을 존중해야 할까?
물론이다. 그러나 문학은 한 번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난다. 작품은 독자의 해석 속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베케트가 그린 세계가 철저히 무의미하고, 하느님이 침묵하신 자리라 하더라도, 그 침묵을 감당하며 여전히 기다리는 인간의 모습은 신앙의 한 형상처럼 다가온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물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오지 않는 고도를 욕망하면서도,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하고, 때로는 서로를 붙잡으며 버틴다.
여기서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신이 보이지 않아도, 신이 침묵해도, 기다림 자체가 신을 향한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베케트의 부정적 세계 안에서도 새로운 빛을 던진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미 그들 곁에, 그들의 기다림 속에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내일을 약속하며, “다시 내일 만나자”고 말하는 그 순간, 고도는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현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베케트 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에서 여전히 신을 갈망하는 인간의 불안을 드러냈다.
그 불안 속에는 역설적인 희망이 있다. 부재의 자리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현존을 느낄 수 있다. 어둠 속에서만 빛이 보이듯, 신의 침묵 속에서만 신의 목소리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절망의 연극이 아니라, 기다림의 신학에 관한 비유처럼 읽힌다. 신의 부재를 외친다고 신의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불평하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가자”고 말하면서도 떠나지 않는다.
그 모순된 태도 속에 인간의 진짜 신앙이 숨어 있다.
믿음이란 확신의 상태가 아니라, 부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도는 하느님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다릴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 기다림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자, 신앙의 본질이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변한다.
그 기다림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재의 공간을 현존의 자리로 바꾸는 힘이 된다.
신이 침묵하실 때조차 신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림 속에 이미 고도가 있었다.”
베케트는 이 책을 통해서,
신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신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역설적 믿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말씀이 사라진 시대의 신앙을 묵상하게 된다.
기다림이 끝나지 않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어쩌면 고도는 이미 우리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은폐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