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문장들을 음미하다
이승우의 장편소설 『생의 이면』은 한 사람의 삶 속에 숨겨진 그림자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주인공 박부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모두의 이면이 겹쳐진다. 문학은 종종 현실보다 더 진실하게 현실을 비춘다. 이 작품이 내게 다가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읽는 내내 밑줄을 긋게 되었고, 그 문장들은 마치 내 삶과 신앙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목회자로 살아오며 내가 붙들어온 질문들, 인간 존재를 향한 근원적 성찰들이 그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책장을 넘기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은 이것이었다.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불행이 지속되면 사람은 저항하기보다 체념하게 된다. 신앙이 없다면, 이 체념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신앙이 있더라도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면, 신앙마저 체념의 언어로 변질된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고통 앞에 무릎 꿇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질병, 가난, 외로움에 시달리며 어느새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이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다. 욥의 울부짖음, 시편 기자의 탄식은 바로 불행을 당연시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다. 불행은 익숙해질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호소해야 할 이유다.
또 다른 문장은 나를 오래 붙잡았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야훼가 금령을 준 것이 아니다. 야훼가 금령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따먹었다. 금령이 없으면 범함도 없다.”
인간의 욕망은 늘 ‘금지’와 마주치면서 활성화된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는 역설.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문장이다. 율법은 선을 지키게 하기보다 오히려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바울의 해석과 닿아 있다. 교회는 종종 금령으로만 신앙을 지키려 한다. “이건 하지 말라, 저건 안 된다.” 그러나 그 금령이야말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신앙을 율법주의로 만든다. 반동성애 그룹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금령은 죄를 막지 못한다. 오히려 죄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든다.
“사람의 몸 속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 것인지, 쏟고 또 쏟았지만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장례식장에서 만난 교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그러나 그것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성경은 눈물을 하찮게 보지 않는다. 시편은 눈물을 “병에 담아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묘사한다. 이승우의 문장은 문학적이지만, 동시에 신학적이다. 인간은 눈물을 다 쏟아내고도 여전히 울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인간이 결코 완전히 위로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기도를 배운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은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른다.
그것을 고향을 버리는 의식으로 삼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를 떠나는 일, 그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목회 현장에서 나는 종종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들을 본다. 그러나 신앙은 전승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신앙을 불태우고 나만의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가 있다. 고향을 버리는 의식, 그것은 잔인해 보이지만 진정한 성숙을 위한 통과의례다.
이승우는 또 이렇게 쓴다.
“사람은 현실에서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니까.”
나는 이 문장에서 현대 사회의 종교 풍경을 본다.
신앙이 아니라 신화에 기대려는 사람들. 사이비 종교가 바로 그 틈을 파고든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답을 준다고 유혹하는 이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화, 현실을 부드럽게 왜곡한 허구일 뿐이다. 신앙은 신화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용기다.
“현실이 평범하지 않으면, 의식도 평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지 않은 현실을 의식 겉면에 그대로 노출해 보이는 평범함을 극도로 혐오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오늘 교회의 예배를 떠올렸다. 삶이 무너져 내리는데, 예배는 여전히 평범한 형식 속에 머무른다. 예배가 삶을 감추는 장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언제나 삶과 의식이 겹쳐지기를 요구한다. 십자가는 가장 평범하지 않은 현실이 의식으로 드러난 자리였다.
“나의 깊고 어두운 방은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나는 내 자아의 지하방 속으로 자꾸만 숨어들었고, 그곳의 어둠 속에서만 평화를 느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내 마음속 지하방을 떠올렸다. 목사라는 이름 뒤에 감춘 상처와 고독, 그리고 거기서만 느낄 수 있었던 묘한 평화. 신앙은 빛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자라난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진실한 기도는 지하방 같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
이승우는 또 이런 놀라운 문장을 남겼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부르는 이름, 지금 내가 내뱉는 고백 속에 운명이 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 속에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이 구절은 목사인 나를 부끄럽게 했다. 교회는 종종 기도를 교리로 가르치고, 올바른 형식으로 훈련시키려 한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놓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답을 원하지 않으신다. 울부짖음, 분노, 억울함, 기쁨, 모든 것이 기도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오래 붙잡은 문장은 이것이다. “사실 그대로 쓴다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박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가장 사실적으로 기록하려 했지만, 결국 그것 또한 선택과 배제를 거친 서술이다. 푸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준 것도 기억의 재구성이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서를 사실로만 읽지 않는다. 기억의 굴절과 해석 속에서 읽는다. 그렇기에 성서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음. 이야말로 감격의 조건이다. 믿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뜻밖의 실현은 사람을 감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 문장을 부활 신앙과 연결해 읽었다.
부활은 믿어지지 않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믿어지지 않음이 감격의 조건이었다. 신앙은 설명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 일어났을 때 시작된다.
“나에게 종교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독서와 탐구의 대상이다.”
이 문장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종교를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는 신앙을 냉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더 깊게 한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묻고 탐구할 때, 신앙은 살아있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문장.
“나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 그랬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사랑은 쉽게 흉기로 변한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지적했듯, 사랑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은 사랑은 종종 흉기가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을 가장한 집착, 신앙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이들의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
“사방이 수렁일 때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다.”
인간의 삶은 종종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수렁 같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그 수렁 속에서 길을 낸다. 십자가는 수렁 같은 죽음이었지만, 거기서 부활의 길이 열렸다.
『생의 이면』을 읽으며 나는 인간의 깊은 내면과 신앙의 본질을 다시 만났다. 불행, 금령, 눈물, 기억, 사랑, 수렁.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어둠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깔려 있다. 이승우의 문장은 목사인 나로 하여금 다시 신앙의 본질을 붙잡게 했다. 신앙은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 부서지고 왜곡된 기억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르는 주관적 결단이다. 문학은 그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또 다른 성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