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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문학으로 읽은'야곱의 사다리'

앎과 무지, 무지와 앎의 경계는 있을까?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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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홀로 길을 떠난다.

성경은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신붓감을 구하러 갔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일 뿐, 실제로 그는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장자의 축복권을 속여 빼앗은 죄책감과 형의 분노, 그리고 위협을 감지한 어머니 리브가의 간청이 그를 광야로내몰았다.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신붓감을 구하러 간다는 명목이지만, 도망자 야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붓감을 구하러 가는 청년 야곱, 도망 자 야곱, 같은 길 위에 두 개의 이름이 얹혀 있는 것이다.


야곱은 낙타 한 마리와 열흘 치의 식량을 챙겼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쫓기고 있었다.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리브가조차 방도가 없었다. 리브가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이승우는 리브가의 마음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맞아야 하는 것임을 그녀는 어렴풋이 의식했다.”


리브가는 단순히 운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미래를 향해 움직였다. 남편을 속여 야곱이 축복받게 한 것도 그녀의 치밀한 계획이었고, 기다리는 일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기다리기 위해 아들을 내보냈다. 카인과 아벨의 비극이 다시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야로 나선 야곱은 형과 달리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다.


“형과는 달리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에게는 없었다. 낯선 것, 생소한 것, 미지의 것, 서먹한 것을 그는 꺼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나 역시 익숙한 세계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익숙한 방에 길들여져 있으면, 그곳의 안락함과 익숙함에 취해 있으면 발전은 없다. 아니, 오히려 퇴보한다. 그러나 야곱은 마지못해 길을 떠났지만,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가는 길에 어떤 바람이 불고 어떤 물이 흐를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지 못했다. 모른 채 가야 했다. 모르지만 가야 했다. 그것이 그의 길이었다.”


이 문장은 우리 인생 전체를 요약한다.

우리는 무엇을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난다. 모른 채 가야만 하는 길, 그러나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 신앙은 바로 이 모름 속에서 걸어가는 행위다.


광야의 첫날 밤, 야곱은 홀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 그는 꿈을 꾼다. 별들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 그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의 장관이 아니라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처럼 느꼈다.


“야곱은 별들이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거대한 탑이라 생각했다.”


별들의 탑은 곧 바벨탑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의 교만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은 땅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야곱이 본 것은 달랐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하늘에 견고하게 붙어 있는 건축물이었다.”


땅에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탑.

그것은 인간이 쌓는 탑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단이었다. 전도서가 말한 ‘해 아래’의 덧없는 탑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기초한 계단이었다. 그 계단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땅과 하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인간의 도피와 방황의 길 위에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통로다.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찾아오시어 약속하셨다. 이승우는 여기서 ‘약속’에 대한 통찰을 덧붙인다.


“약속은 자발적인 부자유의 선언이다.”


인간의 약속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신다. 약속하셨기에 그 약속에 매이신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순종은 명령이 없는 곳에서는 발생할 수 없으므로 자발적일 수 없지만, 약속은 명령이 있는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므로 자발적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문장인가.

야곱의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건이었다.


“그가 몰랐을 때도 그분이 그곳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곳에 계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기 전부터, 아니, 그의 앎(모름)과 상관없이 그분은 그곳에 계셨다. 그의 앎(모름)과 상관없이 그곳에 계시고 다른 곳에도 계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셨다. 그러나 인간은 때가 되어야 그것을 깨닫는다. 신앙은 결국 ‘알지 못했으나 이미 계셨던 하나님’을 깨닫는 사건이다.


이승우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결정할 때까지는 스스로를 숨긴다는 것을.”


하나님은 숨어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실 때, 은혜의 순간을 열어 보여주신다. 루스가 벧엘이 되는 순간, 바로 그때다. 야곱이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그의 도피와 방황은 거룩한 여정으로 바뀐다.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는 단순히 도피담이 아니다.

그것은 모름 속에서 걸어가는 인생, 그리고 알지 못했으나 언제나 계셨던 하나님을 깨닫는 사건이다. 우리도 야곱처럼 도망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이미 계셨고, 여전히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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