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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문학으로 읽은 '탐식'

허기와 탐식은 먹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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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이삭은 말한다.


“사냥해 온 것으로 음식을 차려오면 먹고, 그 다음에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축복의 예고는 오직 에서에게만 알려진다.

야곱은 정보에서 제외된다.

사랑이 한쪽으로 쏠릴 때, 정보는 사랑이 흐르는 방향으로만 새어 나간다. 여기서 이승우는 사랑과 불균형을 이렇게 포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일방적이다.”


편애는 비정상적인 예외가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편향이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사랑이란 원래 매끈하게 평평한 분배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일그러진 기울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한병철의 진단과도 포개진다.

그는 현대가 ‘매끈함’과 ‘일률성’을 미덕으로 삼는다고 지적했다. 긍정성의 과잉이 만든 광택 아래에서는 차이와 상처, 거친 결이 사라진다. 그러나 자발적 사랑은 매끈하지 않다. 울퉁불퉁하다. 균등하게 나누어진 사랑은 대개 제도나 규범이 요구한 ‘공정’의 이름으로 부과된 것이다. 그러니까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사랑의 본성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이상하고 인공적이다.


늙은 이삭은 “죽기 전에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하지만, 성서의 시간은 그가 이 일 후에도 오래 살았음을 덧붙인다. 훗날의 시간은 이삭의 현재를 비웃듯 넘어간다. ‘죽음의 임박’이라는 드라마틱한 프레이밍은 실은 허기가 만든 긴급함일 수도 있다. 축복은 사라지기 쉬운 어떤 것이라기보다, 빌어 주는 행위에 가깝다.


이승우는 말한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적게 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 많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축복은 소유물이 아니라 기원(祈願)이므로, 가진 것과 무관하다. “빌어주는 것”은 빈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삭은 사실 야곱에게도 마음껏 빌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기울기가 한 아들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한 아들은 자연스레 바깥으로 밀려난다. 편애가 작동하면 기도의 문장조차 편애의 문법을 따라 흐른다.



이삭의 에서 사랑은 종종 ‘장자라서’라는 이유로 뭉뚱그려진다.

그러나 이승우는 그렇게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맛이 놓여 있다.

사냥해 온 짐승으로 만든 에서의 요리. 정교한 레시피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맛은 감각이 아니라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맛은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나온다.”


소년 이삭의 기억 어딘가에는 야성의 기운과 바람 냄새, 형의 손맛과 어머니의 숨결, 아버지의 침묵과 모리아산의 바위 그림자가 뒤엉켜 있을 것이다. 결국 이삭이 평생을 좋아한 것은 에서의 요리가 아니라, 그 요리를 둘러싼 기억의 풍경이었다.


이 지점에서 탐식이 정의된다. 탐식가는 미식가의 반대다. 미식가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 고르고 기다리는 능력을 갖지만, 탐식가는 ‘좋아하지 않는 것’도 먹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한다. 탐식은 단지 식욕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의 증상이다. 충만이 목적이 아니라 허기가 견디기 어려워서 반복되는 행위다. 왜 이삭은 탐식가가 되었을까? 작품은 그 연원을 소년기의 상흔, 곧 모리아산의 트라우마에서 찾는다.


묶인 몸, 목덜미를 스치는 칼의 그림자, 낯선 침묵. 소년 이삭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고뇌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칼의 냉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바위에 눌려 신음했고 고민했고 울었고 질문했고… 그럴 때마다 먹었다. 무엇인가를.” 포만은 잠시의 망각을 준다. 그러나 허기는 곧 돌아온다. 그래서 탐식은 한편의 의례가 된다. 끊임없이 먹는 의례. 결핍을 봉인하려는 몸의 기도.


이삭의 기억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 형 이스마엘의 그림자가 비친다.

형이 광야로 쫓겨나던 날, 어머니의 허기를 막으려 들짐승을 잡던 소년의 손.

모리아산의 칼과 광야의 바람은 같은 계절에 속한다.


“허기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


누군가는 흙을 먹고, 누군가는 상처를, 누군가는 사람을 먹는다.

허기를 채우려는 모든 시도는 기억의 복기이며, 때로는 죄의 서막이 된다. 이삭에게 에서의 고기는, 이스마엘의 사냥과 자기의 결핍을 한데 묶어주는 의례의 음식이었다. 그러니 그가 좋아한 것은 맛이 아니라 생존의 서사였다.


이삭은 말한다.

“먹고, 그 다음에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여기서 포만과 축복이 묶인다. 텅 빈 배로는 축복의 문장이 깨어진다. 허기는 타자를 향한 말을 자기 보존의 명령으로 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먹고, 그 다음에 비로소 말한다. 축복은 어떤 넘침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다. 그러니 이삭이 에서에게만 축복을 예고한 것은 맛의 편애를 넘어, 기억의 편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덮어주던 의례를 가져오는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왜 야곱을 사랑했는가.

텍스트는 명확한 이유를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리브가 사랑의 성격일지 모른다. 조건적이지 않은 사랑.


“저주는 내가 받을 터이니, 네 말만 따르라.”(창 27:13)


리브가의 말은 맹목과 천직 사이를 오간다.

이삭의 사랑이 “탐식으로 매개된 사랑”(조건적·감각적)이라면, 리브가의 사랑은 “저주까지 도맡겠다는 사랑”(무조건·헌신적)이다. 둘 다 인간적 사랑이지만, 결이 다르다. 하나는 허기를 달래주는 쪽으로 기운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허기를 안고 가는 쪽으로 기운 사랑이다.




한편 에서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한 그릇의 음식과 장자권을 맞바꾼다.


“에서는 한 그릇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주었지만, 야곱은 한 그릇으로 형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았다.”


이 한 문장에 두 형제의 허기와 기술이 응축되어 있다.

배고픔을 앞세워 미래의 몫을 파는 형, 배고픔을 이용해 현재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동생. 허기는 아우의 계략을 촉발했고, 형의 판단을 무력화했다. 허기 앞에서 존재는 가격으로 환원된다. 장자권은 기억과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지만, 그날은 한 그릇의 댓가로 환산되었다. 이 장면 이후, 허기는 단순한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에너지가 된다. 훗날 ‘야곱–이스라엘’과 ‘에서–에돔’의 긴장은, 허기가 초대한 거래의 기억을 품은 채 유사 이래를 흔든다.



야곱은 축복을 얻기 위해 자기가 아닌 사람이 되는 길을 택한다.

양가죽으로 손을 감싸고, 형의 옷을 걸치고, 형의 요리를 흉내 낸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정체성의 균열에서 축복은 일어난다.

이 장면은 정확히, 축복이 무엇인가를 따지게 한다. 축복은 자기 동일성의 보상인가, 아니면 상처투성이의 타자성까지 안아 주는 선취된 언약인가. 만약 축복이 줄 수 있는 자의 소유였다면, 이삭은 그 의미를 계산해 정당한 수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 축복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허기와 누군가의 탐식, 누군가의 계략과 누군가의 맹목, 그런 비대칭 속에서 예정되지 않은 방향으로 착지한다.


여기서 다시, 이승우의 문장이 살아난다.


“빌어주는 것”은 가진 것과 상관없다.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발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축복은 과연 한정적인가. 인간의 제도 안에서 축복은 늘 희소한 것처럼 취급되어 왔다. 한 사람에게 주면, 다른 사람은 덜 받는다. 그러나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의 경제는 다르다. 사람은 축복을 희소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축복을 과잉으로 만든다. 이야기의 다음 장면에서조차, 에서도 자기 방식의 말씀을 받는다. 총합으로 따지면 존재는 각자 고유한 몫을 받는다. 단지 인간의 시간과 시선으로 볼 때 누군가는 먼저, 누군가는 나중일 뿐이다.



다시 탐식으로 돌아가 보자.

탐식가는 ‘좋아하는 것’을 찾는 미식가와 다르다. 그는 좋아하지 않는 것도 먹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그래서 탐식은 감각의 취향이 아니라 기억의 결핍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이삭의 탐식이 단순한 노년의 기호를 넘어서 모리아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는 평생 ‘그때의 결핍’을 먹는 사람이었다. 에서가 가져오는 사냥의 고기는 현재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봉인이다. 그래서 이삭이 사랑한 것은 음식이 아닌 에서라는 사람, 더 정확히는 에서가 매번 가져오는 ‘그때의 나’를 덮어 주는 의례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삭의 편애는 단순한 감정적 편향이 아니라 상처-관리의 방식이었다. 반대로 리브가의 편애는 상처-수용의 방식이었다. 전자는 상처를 덮기 위해 '특정 의례(먹음'를 필요로 했고, 후자는 상처를 끌어안기 위해 '자기 존재(저주까지도)'를 담보로 내놓았다. 인간의 사랑은 둘 다 필요하다. 다만 어느 하나만 절대화될 때, 사랑은 탐식이나 맹목으로 기운다.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면, 정보의 비대칭이 보인다. 아버지는 에서에게만 축복을 예고한다. 사랑은 권력을 만든다. 사랑받는 자는 먼저 듣는 자가 되고, 사랑받지 못한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된다. 사랑이 권력의 얼굴을 갖는 순간, 축복의 정치학이 시작된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적게 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 많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명제는 소유의 세계에서만 통한다. 축복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삭이 먼저 포만을 찾고, 그 다음에 축복을 말하려 했던 이유는, 소유의 문법과 기원의 문법을 혼동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포만을 얻은 다음에는 누구에게나 마음껏 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서는 한 그릇의 음식을 위해 가진 것을 다 주었고, 야곱은 한 그릇으로 형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았다.” 한 그릇의 힘은 허기의 힘이다. 허기가 판단을 파먹고, 계략이 허기에 말을 건네면 역사는 방향을 튼다. 이후 ‘에서–에돔’과 ‘야곱–이스라엘’은 긴장과 충돌의 역사로 이어진다. 축복이 희소한 것으로 취급될 때, 역사는 영토와 자원과 정체성의 제로섬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이야기의 심연에서, 축복은 언제나 말(로 된 기도)이며, 기억(으로 된 구원)이다. 하나의 축복이 다른 축복을 소거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형식이 다를 뿐이다.



이승우는 「허기와 탐식」에서 먹는 행위와 축복의 언어를 서로 비춘다.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탐식은 멈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먹는 것에서 빌어주는 것으로, 충동에서 기원으로 옮겨간다. 늙은 아버지가 에서의 고기를 기다리며 말한다. “먹고, 그 다음에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러나 이야기는 우리를 다른 쪽으로 이끈다. 먼저 빌라. 그러면 먹는 일도 제자리를 찾는다. 왜냐하면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발화이기 때문이다.


편애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기울기다. 중요한 것은 그 기울기를 숨기지 않고 자각하는 일, 그리고 그 기울기 때문에 배제된 자의 허기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허기는 맛이 아니라 기억에서 온다. 그래서 평생의 한 그릇이 있다. 각자의 삶에. 그 한 그릇을 끓여 주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한다. 그 사랑이 때로는 탐식으로 기울고, 때로는 맹목으로 흐른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우리를 빌어주는 언어로 불러낸다. 축복은 항상 많이 가진 자의 몫이 아니라, 먼저 말해 주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비추는 두 문장을 다시 적어둔다.


“맛은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나온다.” “빌어주는 것”은 가진 것과 상관없다.



이 두 문장을 사이에 두고 「허기와 탐식」을 다시 읽으면, 이삭의 입에 남은 것은 고기의 기름기가 아니라 모리아산의 바람이었음을, 에서의 그릇에 담긴 것은 팥죽이 아니라 가문의 기억이었음을, 야곱의 손에 묻은 것은 형의 털가죽이 아니라 축복의 언어였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더디게 깨닫는다. 허기를 멈추는 유일한 길은 더 먹는 것이 아니라, 더 빌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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