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의 노래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여인에게 단순한 개인적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 전체를 규정짓는 낙인이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일, 집안의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 여인의 가장 큰 책무로 여겨졌던 시대에, 아들이 없는 여인은 늘 ‘쓸모 없는 존재’라는 말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잔인했고, 그 시선은 그녀의 어깨를 숙이게 했다.
사라는 늘 그 시선 속에서 살았다.
신을 믿는 아브라함과 함께 먼 길을 떠났지만, 신앙의 여정 한복판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짓누른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기 몸이었다. 그녀의 불임은 단순한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굴레였다. “하나님이 나를 막으셨다”는 말이 절망처럼 입 밖으로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라는 씨받이 제도를 선택했다.
종 하갈을 남편의 침실로 들여보낸 것이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그 선택은 또 다른 상처를 낳았다. 아이를 가진 하갈은 더 이상 단순한 여종이 아니었고, 사라는 더 깊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아이가 없는 아내의 자리는 아이를 가진 여종의 그림자 속에서 더욱 초라해졌다.
그러나 자신이 아들을 낳고 나니 사라의 마음은 달라졌다.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 이삭은 그녀의 모든 것이 되었다. 이전에는 여종 하갈의 뱃속 아이를 통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자라난다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시오.”
이 말은 너무도 잔인하게 들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우유부단함이 더 크게 드러난다. 사라는 자신의 불안과 질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행동으로 옮겼지만, 아브라함은 그 경계에서 머뭇거렸다. 남편은 신앙의 아버지라 불렸지만, 가정 안에서는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아버지였다. 그 우유부단함은 끝내 여인과 아이를 광야로 내모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사라의 행동은 분명 가혹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시대적 한계와 인간적인 두려움이 얽혀 있다.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려는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때 의지했던 선택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모순. 그녀의 잔인함은 사실 모순된 사랑의 그림자였다.
하갈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인이었다.
주인의 뜻에 따라 남편의 침실로 불려 들어가야 했고, 아이를 낳으라는 요구에도 순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인의 질투와 불안 때문에 다시 광야로 내쫓겼다. 광야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만, 어디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런 길도 보장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모든 곳이 길이라는 것은 곧 어디에도 길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갈은 아들을 안고 그 길 없는 길을 걸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하나님,
땅의 신음을 가장 크게 듣는다는 하나님…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하갈이 느낀 것은 철저한 부재였다.
그녀는 하나님께 항변하고 싶었다. 자신이 종으로 살며 겪어야 했던 모욕,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더 큰 멸시를 당하고 쫓겨난 현실, 그리고 남편 아브라함조차 지켜주지 못한 무력함. 모든 것이 억울하고 참담했다.
광야는 죽음과 절망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깊은 고뇌가 응축되는 자리였다. 하갈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조차 하나님은 들으셨다.
하갈은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부재하는 분으로 느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침묵, 어디에도 길이 없는 황량함.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들의 탈진한 울음소리뿐이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덤불 아래 두고, 차마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멀리 떨어져 울부짖을 때, 그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갈아, 네가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었다. 가장 부재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가장 가까이 현존하시는 분이었다. 인간이 말로 풀어내지 못한 신음, 언어조차 되지 못하는 탄식을 하나님은 들으셨다. 하갈이 쏟아낸 모든 말뿐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까지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권력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라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종으로 내쫓긴 여인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억눌린 자, 울부짖는 자, 버려진 자의 하나님이셨다. 이 경험은 하갈의 삶을 새롭게 열었다. 광야는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 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빈 들에서 우물을 보았고, 그 우물은 단지 물이 아니라 생명의 약속이 되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그녀의 아들에게도 미래를 주셨다.
하갈의 울부짖음은 단지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이 땅에도 여전히 하갈이 있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들, 차별받고 배제당한 이들, 권력과 제도에 의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들이 하갈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땀 흘려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버려진다. 성소수자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니고 있음에도 교회와 사회에서 모욕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겪는 억울함과 탄식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들의 신음은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채 가슴 깊은 곳에 쌓여 있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신다. 교회가 그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잃은 것이다. 신앙의 공동체는 강자의 언어가 아니라 약자의 신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듯이, 교회도 오늘의 하갈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한다.
하갈에게 우물이 열렸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울부짖는 자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나 그 길은 교회를 통해, 신앙의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약자를 외면하는 교회, 타자의 신음을 무시하는 교회는 이미 소돔과 다르지 않다. 부재처럼 보이지만 현존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울부짖는 자의 곁에 계시며, 그 소리를 가장 크게 듣고 계신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살아남아 장성했고, 그의 후손은 아랍 민족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창 21:20)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 이삭만이 아니라,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도 돌보셨다. 그를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이 전승은 이슬람의 형성과 깊이 연결된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메카 근처에서 정착했고, 그곳에서 오늘날까지 이슬람 신앙의 중심이 된 젬젬 우물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들에게 하갈은 단지 종이 아니라, 신앙의 어머니로 기억된다. 기독교와 유대교 전통이 사라와 이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이슬람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정체성을 세운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하나님은 한 민족, 한 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변방의 여인 하갈의 신음도 들으셨고, 버려진 아들의 눈물도 보셨다. 그들의 후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여셨다.
오늘 우리가 쉽게 “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심지까지 “적대적 종교”라고 낙인찍는 이슬람조차도,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물 속에서 일으키신 역사의 한 갈래다. 그렇다면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기독교가 이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인류의 또 다른 여정을 이해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