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의 죄는 동성애가 아니었다
이승우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선으로 비추는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이 한 일』의 첫머리에 나오는 “사랑은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문장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의 단편 「소돔의 하룻밤」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입장에서, 롯의 입장에서, 또 제3자의 시선에서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다층적인 시선 속에서 소돔 이야기는 단순한 타락의 서사가 아니라, 환대와 배제, 인간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변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본문은 오랫동안 성적 타락, 특히 동성애의 죄를 상징하는 본문으로 오해되어 왔다.
소돔의 멸망 이야기는 흔히 성적 타락의 상징으로만 읽히곤 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멸망의 이유는 단순한 도덕적 문란이 아니라 환대의 부재였다.
천사들이 소돔을 찾았을 때, 그들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살피는 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집 안은 주인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꾸밈없는 민낯은 길 위에서, 숨겨지지 않은 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롯은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였다. 집 안은 은폐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호의와 환대가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그때 소돔의 백성들은 낯선 이를 배척하고 모욕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본래 ‘롯의 집’처럼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환대를 잃어버렸다. 성소수자를 향해, 가난한 자와 이주민을 향해, 낙태와 안락사 문제 앞에서, 그리고 타종교인에 대해 교회는 환대가 아니라 혐오와 배제를 선택했다. 교회 안에서조차 상처받은 이들이 떠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환대를 잃어버린 교회는 이미 소돔의 길을 걷고 있다. 신앙을 지킨다 하면서도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생명을 살리기보다 죽음의 문화를 확산한다. 환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된다.
롯은 나그네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성문 어귀에서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불안과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읍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나그네가 오기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은 흥분을 예열하는 기다림이었다.
그들의 기다림 속에는 개인이 없었다. 오직 무리만 있었다.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의심이나 성찰도 사라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충족되어야 하는 욕망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으로 모여 무시무시한 일을 서슴없이 하려 했다. 집단은 개인의 양심을 흡수해 버리고, 순수한 욕망의 기계가 된다.
오늘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혐오와 차별을 외치는 군중들, 이념과 종교적 명분에 사로잡혀 증오를 정당화하는 집단들. 그곳에는 자기 성찰이 없고, 질문도 없다. 오직 확증된 믿음과 집단적 흥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쉽게 폭력이 가능해진다.
신앙이 집단적 신념으로 전락할 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기계로 변한다. 반대로 진정한 신앙은 늘 불안 속에서, 책임 있는 기다림을 선택하는 것이다. 롯의 기다림은 안절부절했지만, 그 안에는 타자를 지키려는 분별이 있었다. 그러나 소돔의 기다림은 흥분과 욕망만 있었고, 결국 파멸로 이어졌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흥분이 아니라, 소수의 분별이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불안을 감수하며 책임지는 사람, 그 사람만이 욕망의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남는다.
롯은 성읍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 악한 짓을 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악한 짓임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알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행하려는 나쁜 짓은 단순하지 않았다. 큰 무리, 힘센 집단이 개별자로 떨어져 있는 힘없는 존재를 위협하는 일. 다수의 폭력이 소수를 향해 쏟아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치명적인 폭력이다. 소돔의 남자들은 그저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나그네들을 모욕하고 해치려 했다.
오늘날에도 이 폭력은 여전히 반복된다. 이주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 성소수자들… 다수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고 배제된다. 다른 점은 단 한 가지,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폭력의 본질은 그대로다. 폭력은 단지 신체적 해를 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뺨을 때리는 행위는 모멸을 각인시키는 폭력이다. 성기 혹은 유사 성기에 가해지는 폭력은 인간의 존엄 자체를 훼손하는 가장 잔혹한 폭력이다. 그것은 생명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이 폭력을 행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한 짓은 행위자가 그 행위의 악함을 인지하든 하지 않든 악하다.” 그러나 죄인 줄 모르는 죄는 더 깊다. 회개의 기회조차 가로막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고 조롱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소돔의 폭력과 예수 시대의 폭력, 그리고 오늘날의 혐오와 차별은 다르지 않다. 다수의 힘이 소수를 짓밟는 순간,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할 때, 죄는 더 무겁고 깊어진다.
요즘 20대 청년들은 확실한 답을 원한다. 너무도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 전쟁의 그림자, 끝없는 경제 불황, 일자리 부족, 관계의 불안정… 청년들에게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내일은 언제나 불안하다. 이런 시대에 “열심히 하면 된다”는 낡은 조언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대신 즉각적이고 확실한 “정답”을 요구하게 된다. 바로 이 틈을 사이비가 파고든다. 그들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마치 문제집의 정답처럼 확실한 구호를 내건다.
“우리 집단에 들어오면 안전하다.”
“이것만 지키면 구원받는다.”
“세상은 곧 끝난다. 오직 이 길만이 정답이다.”
불확실성에 지친 청년들은 이런 말에 쉽게 이끌린다. 정답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를 빼앗고 생각을 중단시키는 함정이다. 신앙을 ‘정답’으로 축소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맹신의 도구가 된다.
성경은 정답집이 아니다.
욥은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하나님은 공식 같은 답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 더 큰 신비 속으로 불러들이셨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질문을 던지셨지, 단순한 정답을 주지 않으셨다. 신앙은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답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을 걷는 것이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해줄 일은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질문을 함께 붙들어 주고, 함께 견딜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환대와 신뢰가 있는 공동체, 다름을 품고도 함께 살아가는 집. 그것이 진짜 교회의 역할이다. 정답을 말하는 사이비는 청년들에게 안전을 약속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영혼을 속박한다. 그러나 진리이신 하나님은 정답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신비 속으로 부르시며, 그 너머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여신다.
롯이 원한 것은 단순했다. 구별이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키자는 호소였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그를 향해 말했다.
“네가 재판관 노릇을 하려느냐?”
그들의 눈에 롯은 마치 군림하며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보였다. 하지만 롯은 판결을 내리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호소하는 재판관, 폭력을 멈추라고 간청하는 무력한 외지인이었다. 오히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러 온 천사들처럼, 그들 안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나그네에 불과했다.
문제는 소돔 사람들의 상태였다. 그들은 이미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자기 바깥의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직 자기 생각,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외부의 권위와 경고는 모두 거부되었고, 남은 것은 자기 확신뿐이었다. 그래서 롯의 간청조차 심판처럼 느껴졌고, 그 심판은 그들의 욕망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그건 잘못된 길이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네가 무슨 재판관이냐?”라는 조롱과 공격이다. 자기 확신에 갇힌 사람은 분별의 목소리를 불편해하고, 결국 그 목소리를 낸 이들을 소수자, 외부인으로 내몰아 버린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구별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환대와 폭력은 같을 수 없다. 그 차이를 지워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욕망의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소돔 사람들이 그랬듯,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힌 이들의 끝은 파멸일 수밖에 없다.
롯이 두 명의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한 장면은 충격을 준다.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패륜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게다가 그의 딸들에게는 이미 약혼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제안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조차 없었다.
주목할 점은, 군중들이 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성적 욕망이나 쾌락이었다면, 딸을 내어준다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다. 이는 소돔 사람들의 목적이 성적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진짜 욕망은 외지인을 모욕하고 짓밟는 일이었다. 성적 행위는 단지 수단이었다. 타자를 향한 배제와 혐오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소돔의 죄가 “동성애”라기보다는, 외지인 혐오와 환대 거부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언한다.
그렇다면 롯은 왜 딸들을 내어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을까? 아마도 그는 그들의 광기를 멈출 수 없음을 알았고, 어떤 식으로든 손님들을 보호하려 했다. 딸을 내어주겠다는 말은 실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손님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이었을 수 있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 광기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가?”
롯의 제안은 도덕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손님을 지키려는 환대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군중의 거부는, 소돔의 죄가 성적 욕망이 아니라 타자를 모욕하려는 집단적 폭력이었음을 드러낸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와 동성혼을 반대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음란과 타락 때문에 소돔을 멸망시키셨다”는 식의 단순한 해석이 반복된다. 그러나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소돔의 죄는 단순히 성적 문란이 아니라 환대의 부재와 폭력이었다. 낯선 이를 거부하고, 이방인을 모욕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태도가 멸망의 이유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낯선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교회야말로 소돔과 고모라와 닮아 있지 않은가.
오늘 교회는 어떤가. 교회는 본래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집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는 환대를 잃어버렸다. 성소수자와 가난한 이웃, 이주민과 타종교인,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환대가 아니라 종종 혐오와 배제를 선택한다. 교회 안에서도 상처 입은 이들이 머물지 못하고 떠나간다. 환대를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다. 스스로 믿음을 지킨다 말하지만, 사실은 소돔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세상의 인정보다도 먼저 낯선 이를 기꺼이 맞아들이는 마음이다.
롯은 낯선 이들을 맞아들임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구원으로 이끌었다. 오늘 교회가 다시 붙잡아야 할 것도 바로 그 마음이다. 환대를 되찾지 않는 한, 교회는 교회답지 못하다.
낯선 이를 맞이하는 일, 상처 입은 자를 품는 일, 무거운 짐을 진 자와 함께 서는 일—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길이다. 교회가 이 길을 외면할 때 사랑은 사라지고 믿음은 껍데기만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환대의 마음을 회복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에는 단편 「소돔의 하룻밤」외에 「하갈의 노래」,「사랑이 한 일」,「허기와 탐식」,「야곱의 사다리」가 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굵직한 사건들이다. 한 편으로 정리하는 것은 무리다 싶어 단편들을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