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한일
창세기 22장은 단 세 절의 간결한 시작으로,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인류가 풀어보려 애써온 가장 난해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열어놓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지시할 산에서 그를 번제로 바쳐라.”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들은 뒤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났다고 기록한다.
너무나 단순하게 서술된 본문 속에서, 독자는 오히려 수많은 질문에 휩싸인다. 어떻게 이런 명령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런 순종이 가능했을까.
이승우 작가는 『사랑이 한 일』에서 이 본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는 사건을 단순한 신앙적 순종의 서사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역설, 아버지와 아들의 침묵, 그리고 신과 인간이 서로를 시험하는 긴장을 사색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 가지 명제를 붙잡는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끝내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안다.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이미 바쳐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삭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을지 모른다.
“맞아요,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신이 어디 있겠느냐.”
사랑은 역설이다. 이승우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힘들지 않지만, 그래서 요구되지 않지만,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힘들다.”
또 이렇게 말한다.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이다.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 바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제물이 될 수 없다. 바쳐지지도 않고, 바쳐질 필요도 없다. 신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깊은 애착이 깃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말한다. “아들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한 것이다. 내 지나친 사랑이 이 일을 만들었다.” 사랑은 무서운 것이다.
이삭도 깨닫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듯,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아버지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 것 같아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은 바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 가장 고통스러운 이는 아브라함만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 하나님 자신도 그 고통에 참여하고 계셨다. 아버지를 바치는 일은 가능하지만 아들을 바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신이 원한 것은 바로 그 불가능이었다. 이승우는 말한다. 신은 쩔쩔매셨을 것이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기에,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아브라함은 사흘 동안 모리아 산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었다. 이미 바쳐진 사람의 얼굴로, 그는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리며 걸었다. 그의 걸음 하나하나는 영혼의 몸부림이었다.
이승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는 또 사랑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진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랑 때문에 아들을 바칠 수 없었고, 동시에 사랑 때문에 아들을 바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불가능과 가능이 뒤엉킨 자리, 그곳에서 그는 신비와 마주했다.
사랑은 침묵으로도 말해진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아브라함이 침묵했던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말을 끌어온다고 해도 그날 일어난 사랑의 사건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언어를 초월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사건은 “바쳐라”로 시작되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로 끝났다.
바치라는 것도 사랑이고, 하지 말라는 것도 사랑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마련하신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을 바치거나 바치지 않을 뿐이다.
“먼저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시험한다. 사랑을 시험하는 자는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이다.”
아브라함만이 시험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삭 역시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신은 인간인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은 무섭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사랑은 끝내 시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불가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예배하러 간다고 했다. 예배는 곧 바침이었다. 그러나 그 바침은 단순히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일이었다.
사랑은 침묵 속에서도 말해진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사랑은 요구하기도 하고, 포기하게도 한다. 사랑은 무섭고도 신비롭다.
이승우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는 또 사랑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진 사람이었다.”
그날 모리아 산에서 일어난 것은 바로 사랑이 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