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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2)

고장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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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 마지막 장(민음사 번역본으로는 2권) 인 〈고장의 이름〉은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발벡,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의 이름에 깊이 매혹된다. 그는 그곳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지도 속 이름만으로도 그곳의 향기, 바람, 사람들의 옷차림, 심지어 하늘의 빛깔까지 상상한다.


그에게 발벡은 실제 장소가 아니라,

예술적 환상의 세계이고,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향취가 응축된 이름이다.

그는 그 이름들을 통해 현실이 아닌 ‘욕망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훗날 발벡에 실제로 가본 그는 실망한다.

그토록 동경하던 발벡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해안 도시였고, 상상 속 낭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이름’이었음을.

이름이 불러일으킨 상상, 그 안에서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프루스트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 현실보다 ‘이름’을, 실체보다 ‘기호’를 사랑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언제나 그 실체라기보다, 그 이름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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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는 신앙의 방식과 놀랍게 닮아 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이름을 사랑하지만, 정작 그 나라가 의미하는 삶은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 고통이 없는 낯선 세계, 현실을 벗어난 안식의 공간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고 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목적지가 아니라 현재 속에 이미 시작된 삶의 방식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정의를 세우고, 용서하며 살아갈 때 그 나라가 드러난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는 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름으로 존재하는 천국’을 사랑한다.

그것은 마치 프루스트의 주인공이 가보지도 못한 발벡의 이름에 사로잡혀 환상을 키우는 것과 같다. 아직 가지 않은 세계의 낭만을 붙잡고, 현실의 불완전함과 고통을 외면한다. 하나님 나라도 그렇게 상상의 공간으로 만들어지면, 현실의 고통과 부정의는 신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죽어서 가는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의 절규를 외면하는 것이다.


내세 신앙에 집착하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는,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종교가 억압된 인간에게 일시적 위안을 주지만, 결국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약속하며 지금의 불의에 침묵하는 신앙은, 마르크스가 비판한 그 “아편적 종교”의 전형이다. 그것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진실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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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그런 식의 위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피의 장소가 아니라, 책임의 현장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의 찬양이나 신앙의 언어 속에 머물지 않는다.

약자의 눈물 속에 있고, 차별받는 이들의 신음 속에 있으며, 불의한 권력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 나라는 언젠가 ‘올’ 세계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을 볼 수 있으려면, 이름에 매달린 환상의 신앙을 내려놓아야 한다.

발벡의 이름을 사랑하던 주인공이 실제의 발벡을 보고 환상이 깨지듯, 신앙인도 하나님 나라의 이름을 넘어 실재를 살아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국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현실이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 나라가 구현되는 순간들이다.

이웃을 용서하고,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불의에 맞서며, 사랑을 실천하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지 않으면서, 죽어서 가는 천국을 기다리는 것은 ‘이름만 사랑하는 신앙’에 불과하다.


프루스트의 주인공은 결국 발벡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름이 만들어낸 꿈을 사랑했을 뿐이다. 신앙인도 그와 같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종종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위안과 안전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분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이웃의 얼굴 속에서, 침묵과 상실의 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고장의 이름〉은 말한다. 인간은 이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실은 이름 너머에 있다고. 신앙 역시 그 이름의 환상을 넘어야 비로소 깊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우리가 그 뜻을 사랑할 때, 그 이름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 이름 속에 머무는 신앙에서 벗어나, 이름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그것이 예수가 보여주신 믿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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