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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은폐된 동행의 자리에서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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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한 여성 작가의 고백이자, 한 신앙인의 절규이다.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온 책으로, 2024년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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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한 여성 작가의 신앙 고백이자,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쏟아낸 절규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글 속에는 욥기의 통곡이 겹쳐져 있다.

“주여,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 8:8).

이 구절은 단지 기적을 바라는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그분을 향해 손을 뻗는 믿음의 언어이다.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 정말 어디 계셨습니까?”



이 물음은 신앙의 부정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정직한 형식이다.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만, 인간은 신앙의 진짜 깊이를 배운다.



박완서는 젊은 시절부터 신앙인으로 살아왔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다.
그녀의 신앙은 무너졌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이 말은 욥의 탄식과 다르지 않다. 욥도 의롭게 살았으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치시는가.”


욥과 박완서, 두 사람의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신앙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신앙의 언어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뜻이 있으시겠지요”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그들은 뼈저리게 안다.
그래서 그들은 설명 대신 침묵으로 하나님을 대한다.
신앙이란 신을 변호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 앞에 맨몸으로 서는 일임을 깨닫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의 제목은 역설이다.
그녀는 한 말씀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침묵을 ‘응답’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부재하신 것이 아니라, 말이 멈춘 자리에서 함께 하신다.
그분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은폐된 동행의 방식이다.


이 ‘은폐된 동행’이라는 표현은 욥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욥의 절규에 즉각 대답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 나타나,
“너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욥 38:4)라고 물으신다.
그것은 논리적 대답이 아니라, 존재의 대면이다.
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언어가 무력해지는 자리에서, 비로소 신의 현존이 드러난다.
박완서가 깨달은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오만이었다.”


신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계심으로만 체험되는 존재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속을 함께 걸으시는 분이다.
‘은폐된 동행’은 바로 그 신의 방식이다.


욥의 결말을 단순한 보상 이야기로 읽는다면, 그의 신앙을 오해한 것이다.
그가 두 배의 재산과 새로운 자녀를 얻었지만, 잃은 자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회복은 ‘되돌림’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기’다.
박완서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을 새롭게 얻었다.


“나는 아들을 잃고서야 하나님을 조금 알았다.”


그녀에게 신앙은 더 이상 기쁨의 이름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 붙드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은 고통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게 하시는 분이다.
신앙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 다시 걷는 용기이다.


‘은폐된 동행’이란 바로 그런 신앙의 태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응답이 없어도,
그분은 여전히 곁에 계신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울고, 우리가 쓰러질 때 우리를 품으신다.
다만 그분은 드러나지 않은 채, 침묵의 방식으로 우리와 동행하신다.


박완서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도였다.
그녀는 “쓰는 일이 곧 기도였다”고 고백한다.
말을 잃은 사람은 글로 말한다.
그 글은 신에게 바치는 가장 긴 기도이며, 침묵 속에서 태어난 가장 순수한 언어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와 탄식은 신학이 아니라 기도였다.
그는 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신에게 매달린다.
박완서의 글쓰기는 욥의 기도처럼, 고통을 말로 봉합하는 신앙의 행위다.
그녀는 신을 잃지 않기 위해 썼고, 쓸수록 신이 가까워졌다.
그것이 ‘은폐된 동행’의 또 다른 형태였다.


글쓰기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상처를 통과해 다시 살아가는 언어의 부활이다.
신이 침묵하실 때, 인간은 써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또 다른 행위다.


욥기의 마지막 고백은 이렇다.


“이제는 귀로만 들었사오나, 눈으로 뵈옵나이다.”(욥 42:5)


이 구절은 박완서의 신앙 여정과 겹친다.
그녀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본다’.
하나님이 어느 날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늘 곁에 계셨음을 새롭게 깨닫는 눈이 열린 것이다.


신앙은 세상이 변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변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흔적이, 눈물의 자리에 은은히 빛을 비춘다.
그 빛이 바로 ‘은폐된 동행’의 증거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심으로 말씀하시고, 숨어 계심으로 동행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응답이 없어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박완서에게 그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신비였다.
신이 부재한 듯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거룩한 동행의 기미를 느낀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은폐된 동행’은 단지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영적 실재다.
고통 속에서도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침묵은 말씀의 또 다른 형태이고, 부재는 임재의 또 다른 표현이다.


결국 신은 부재 속에 계시고, 침묵은 말씀의 다른 형태이다.
그 침묵을 견디며 믿는 자가, 오늘의 욥이고, 박완서이며,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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