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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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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따스하게 감싸 주지 않는

힘겹고, 뜨겁기만 한 낮은 없다.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어머니 같은 밤이 감싸 안아 주리라.


헤르만 헤세의 글만 따라 읽다보면 무한 긍정주의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위의 문장을 살펴보면, 그가 힘겹고, 뜨겁고,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운 날들을 지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저녁과 밤은 '어머니' 같은 상징만 담고 있지 않다.


어딘가에 라는 그의 시를 보자


광야 같은 인생길 고달프게 해매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더라도


어딘가, 거의 잊혀진 그곳에

예쁜 꽃 만발하고 그늘 드리운

시원한 정원이 있음을 나는 알아요


어딘가, 먼 꿈속에

내 영혼의 고향,

단잠과 별이 기다리는

안식처가 있음을 나는 알아요


이 시 역시도 '광야 같은 인생길, 무거운 짐을 진' 삶을 살아온 이만이 노래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는 삶을 결코 낭만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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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교외에 있는 한 카페를 들러 차를 마셨다.

'헤세.....'

『싯다르타』와『데미안』을 떠올렸고,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글을 많이 쓰고, 동양적인 사상도 아우르는 작가라는 생각 정도를 떠올렸다. 수없이 들었던 이름이지만, 나는 '헤세'를 깊이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겨울이 오기 전에 그를 조금이나마 알아야겠다 생각했다.


이미 겨울은 왔지만, 깊어지기 전에 그의 책 『삶을 견디는 기쁨』을 읽었다.


『삶을 견디는 기쁨』, 제목부터 삶을 “견딘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보통의 자기계발서나 심리서라면 “삶의 기쁨”이나 “행복한 삶”이라는 말로 포장하려 할 텐데, 헤세는 차라리 삶을 견디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견딤 속에서 기쁨을 발견했다. 이 기쁨은 감정적 환희가 아니라, 통과된 상처의 자리에서 길어낸 깊은 호흡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헤세의 글에서 싸구려 위로가 아니라, 성숙한 긍정의 숨결을 느낀다.


헤세는 평생 우울하고 양가적인 정서 사이를 살아왔다.

어린 시절의 정서적 불안, 종교적 가정이 주는 억압, 청소년기의 극심한 방황과 정신요양원 경험, 성인기의 전쟁 체험과 결혼 실패—그의 삶은 기쁘기보다 무거웠다. 그렇기에 그는 타고난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통을 직면한 사람이다. 그 직면의 길에서 그는 발견했다. 기쁨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딘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 같은 것이다.


그에게 기쁨은 슬픔을 지워주는 마취제가 아니다.

슬픔을 품는 가장 깊은 힘이 바로 기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을 견딤으로써 기쁨을 배웠다.

기쁨은 고통을 건너가는 법을 아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헤세가 강조하는 ‘견딤’은 단순한 참음이나 의지의 문제와는 다르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내려가는 용기를 가리킨다.

그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길’, 즉 융 심리학이 말하는 개별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반드시 고통을 포함한다.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 세계와 충돌하는 혼란, 정체성이 흔들리는 고독—이 모두를 지나야만 참된 자기가 된다. 그래서 그의 기쁨은 통과제의적이다. 삶의 문턱을 넘어가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 세계에서 느끼는 기쁨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통찰은 신학적 구조와도 깊이 연결된다.

헤세는 기독교인을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의 세계관은 기독교적 영성과 닮아 있다.

“죽음은 부활의 통과제의다. 죽음은 단수지만 부활은 복수다.”

이 말은 헤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죽여야 지혜가 태어나고, 데미안의 에밀은 알을 깨는 ‘파괴’를 통과해야 참된 자아로 날아오른다. 파괴—침묵—재탄생의 구조는 기독교의 십자가—무덤—부활의 구조와 너무도 닮아 있다. 결국 기쁨은 고통 이후에 오는 초월의 경험이며, 전혀 새로운 생의 탄생이다.


헤세는 자연을 통해 이 원리를 더 깊이 묘사한다.

나무가 자라는 속도, 계절이 흘러가는 순환, 잎맥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그에게 자연은 늘 고통과 기쁨이 함께 흐르는 큰 영혼이었다. 겨울의 추위를 견뎌야 봄의 꽃이 피고, 한 번 떨어진 잎은 더 깊은 영양이 되어 나무를 살린다. 자연은 결코 서둘러 기쁨을 창조하지 않는다. 자연의 기쁨은 견딤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간다. 헤세의 기쁨 역시 그러하다. 빠르게 얻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영혼의 빛이다.


그래서 삶은 기쁨의 상태가 아니다.

삶은 기쁨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고통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길이다.

통과하는 자만이 기쁨을 얻는다.

견디는 자만이 기쁨의 깊이를 안다.

이 기쁨은 상처를 제거하는 기쁨이 아니라, 상처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헤세의 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위로는 얄팍한 긍정이 아니다.

그의 긍정은 치열한 싸움 끝에 남겨진 잔잔한 호흡이다.

인간의 슬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긍정, 고통의 무게를 인정하는 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하려는 긍정이다. 그래서 헤세의 기쁨은 읽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린다. 그의 기쁨은 경험의 기쁨이며, 통과의 기쁨이다.


결국, 삶은 기쁨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은 견딜 때 비로소 기쁨이 된다.
기쁨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견딘 사람의 영혼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시간을 견디고, 어둠을 견디고, 나 자신을 견디고 나서야 우리는 기쁨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용히 고백하게 된다.


삶은 기쁨이 아니다.
삶은 견디는 기쁨이다.


3부 마지막 장 '세상이여 안녕'은 죽음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깊은 통찰을 준다.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는 떠나야 한다.

이 땅의 한바탕 유희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기쁨과 고통을 주었고

많은 사랑을 주었다.


헤세의 글이나 시를 읽을 때 고난이라는 통과제의를 마친 한 사람의 고백임을 기억하고 읽는다면, 힘든 시절도 견디는 기쁨의 단편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위로를 받고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듯하다.


한 겨울 추위도 따뜻한 차 한 잔과 헤세의 글이 어우러진다면 따스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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