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영구
제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구'자 돌림으로 친척들 이름에는 각종 'X구'가 다 모여있습니다. 은구, 성구, 명구, 현구, 준구, 갑구, 을구, 일구, 칠구, 덕구 등... 그중 저는 영구였고요.
게다가 성이 '도'가 입니다. 도로 시작하고 구로 끝나는 세 글자 이름은 웬만해서는 모두 개성이 넘칩니다.
제가 태어날 당시엔 영구라는 캐릭터가 없었죠. 저는 82년 9월에 태어났고, 영구가 등장한 '유머 1번지'프로그램은 83년 4월에 방영을 시작했네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영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7개월 후에 '영구'라는 캐릭터가 나올 줄 아셨을까요?
"아버님, 안돼요. 어떻게 여자애 이름을 영구라고 지어요?"
결론적으론 엄마가 시아버지의 의견에 용기 있게 맞서 주셔서 '도영구'라는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딸이 태어나고 7개월 후에 '영구'캐릭터가 나올 줄 아셨을까요?
만약 이름이 영구인 채로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구 캐릭터가 저를 졸졸 따라다녔겠죠? 친구들은 엄청나게 놀렸을 테고, 이름을 말할 때마다 "어, 영구 있네! 영구 없는 줄 알았는데." 하는 농담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수줍음 많았던 어린 시절 내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영구라는 이름으로 살아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 제 이름을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테니까요. 이름 자체로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름을 가지고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이름도 사람이 훌륭하면 비범하게 느껴지고, 들어서 웃음이 나오는 이름 또한 이름의 주인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더욱 멋있어 보일 수 있겠죠.
영구로 살든, 지금의 이름으로 살든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글을 발행하려고 하니, 브런치 키워드 추천이 재미있어서 공유합니다.
이 생각은 또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