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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매이 Feb 19. 2023

자소서 인생

요즘 나는 '자소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퇴근 후에도 노트북을 펴서 저녁 먹는 것도 잊고 자소서를 쓴다. 오늘은 공공기관, 내일은 스타트업… 관심이 가는 기업이 생기면, 일단 쓴다. 맞다, 난 쫓기고 있다.


계약 만료 2주 전이다. 이번 달에만 이미 서탈 1번, 면탈 1번을 경험했다. 부서진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이번주에 자소서를 두 곳 쓰기로 했다. 신에게는 아직 두 발의 총알이 남아있습니다. 


계약 만료일이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한 발(나머지 한 발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담갔던 조직을 떠나 무시무시한 취준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이제 돈 들어올 곳이 없으니 서울의 월세며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루하루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자소서를 쓰는 건 굉장한 감정 노동이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내 모든 정신과 마음가짐을 일치시켜 나의 경험과 생각을 자소서에 녹여내야 한다. 그동안 썼던 내용을 복붙하는 방법도 있지만, 회사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자소서 문항마다 강조해야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매번 같은 경험이라도 문장을 새롭게 쓰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회사의 비전과 나의 꿈을 합일시켜 자소서를 쓰다보면, 난 어느새 그 회사의 일 잘하는 직원으로 빙의해 있다. 자소서 쓰는 속도가 느려지면, 회사의 위치를 카카오맵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초봉은 얼마인지, 더 나아가 정규직이 되면 전셋집을 구할 수 있으니 회사 근처 전세매물도 부동산 어플로 알아본다(이건 쓰면서도 조금 부끄럽다). 서류 지원도 하기 전에 김칫국 제대로 마시는 것 같지만 이런 달콤한 상상이 때로는 출근 5시간 전 새벽까지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게하는 동력이 된다.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고 메일을 열기 전에 몇번이고 되뇌었다. 아, 이번에도 서류탈락이다.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이미 상상으로 그 회사에 10번도 더 출근한 나로서는 서류 탈락 문구를 보는 순간 허탈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오천 자가 넘는 나의 문장이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 회사에 입사할 순간을 떠올리며 설렜던 나의 진심이 한번에 부정당하는 느낌에 상처를 받는다. 마치 편지를 밤새 써서 고백했는데 갑자기 차인 느낌이랄까. 나의 어떤 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는 대답이 없다.


서탈 소식을 들은 날은 하루 종일 기운이 빠진다. 퇴근 길, 지하철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자소설닷컴 어플에 들어가 채용 공고를 훑어본다. 회사 이름이 나열되어있는 핸드폰 화면이 마치 서울의 야경같다. 이 빛나는 이름들 중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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