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
알잘딱깔센! 뭔 말인가 싶지만 줄임말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이 상대에게 원하는 완벽한 일처리 방식을 의미한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품질은 높게, 목표에 부합하되 군더더기 없이, 거기다 예상밖의 감동 포인트도 더해서. 얼핏 시크함으로 무장한 단어의 조합이지만 완벽에 가까운 수준을 요구하는 무시무시한 말. 그 '알잘딱깔센'의 모범답안 같은 선배가 있었다. 준비와 실행, 평가까지 완벽에 가까운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는 선배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생각보다 허탈한 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성공이나 칭찬 같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닌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라는 답이 당시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그렇다 그런 류의 사람은 말린다고 일을 대충 할 부류가 아닌 거다. 태생이 그런 것! 19세기 영국의 천재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미술사의 많은 화가들이 그러하듯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한 엄마는 9살이던 밀레이를 데리고 왕립예술아카데미의 원장을 찾아가 다짜고짜 자신의 아들이 천재이니 입학을 시켜달라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본 원장은 밀레의 천재성에 적잖이 놀랬지만 너무 어린 탓에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냈고, 11살이 되어서야 입학을 허가한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입학이었다.
기대에 가득 찬 밀레이는 이내 실망하게 되는데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지향하는 미적 목표는 르네상스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카데미 교육의 최고 목표였다. 르네상스 미술은 대상을 이상화하고 필요 없는 부분은 생략하여 과장되고 아름답게 표현하였기에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 속 인간은 너무나도 완벽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걸작들이 밀레이에겐 그저 부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밀레이는 현장에서 직접 보이는 것들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꾸밈없는 자연 앞에서 겸손한 인간의 자세로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사람은 물론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9살이 되던 해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윌리엄 홀먼 헌트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를 만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를 결성한다. 라파엘로가 활동했던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라파엘전파는 19세기 영국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주류 화단에 반발하며 1400년대 이탈리아 예술이 지닌 강렬한 색감, 복합적인 구성과 풍부한 디테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주로 신화와 전설, 문학 등을 주제로 삼아 그 내용을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라파엘전파의 수장인 존 에버렛 밀레이의 무시무시한 알잘딱깔센 <오필리아>를 보자. 도대체가 대충이란 없는 작품이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만큼 완벽하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림 속 여인은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아다. 햄릿은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여성혐오에 빠져 오필리아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또한 실수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기까지 했다.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오필리아는 결국 미쳐버리고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다가 노래를 부르며 숲 속을 헤맨다. 밀레이는 햄릿의 4막 7장에 햄릿의 어머니이자 덴마크 왕비인 거트루드가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스에게 오필리아의 비극적인 최후를 전하는 장면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거울 같은 물 위에 하얀 잎을 비추며 냇가에 비스듬히 수양버들 자라는데, 그것으로 네 누이가 기막힌 화환을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들국화, 그리고 입걸은 목동들은 더 야하게 부르지만 정숙한 처녀들은 죽은 이의 손가락이라 부르는 야생란과 엮어서 만들었지. 흰 가지에 풀꽃 관을 걸려고 올라가다, 짓궂은 실가지가 부러져 화환과 네 누이는 눈물처럼 흐르는 개울 속에 떨어졌어. 입은 옷이 쫙 퍼져 그녀는 인어처럼 떠 있게 되었는데, 그동안 옛 찬가 몇 구절을 불렀단다. 자신의 위기에는 무감각하게 되었거나, 물에서 태어나고 거기에 적응된 생명체가 된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에 잠겨 무거워진 옷은 고운 노래 부르는 불쌍한 그 애를 진흙 속 죽음으로 끌고 갔어."
누군가 이 오필리아의 죽음이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으로 묘사된 죽음의 장면인 것 같다 했는데, 밀레이의 그림 또한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으로 묘사된 죽음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의 배경을 그리기 위해 밀레이가 선택한 곳은 잉글랜드 서리(surrey) 근교의 호그스밀(Hogsmill)의 강둑이었다. 수풀이 무성한 그곳에서 하루 11시간씩 5개월간 그림을 그렸다. 살을 뜯는 파리떼 그리고 악천후와 싸웠고, 어떤 날에는 강풍에 휩쓸려 죽을 고비도 넘긴다. 들판에 무단 침입하고 건초를 파괴했다는 이류로 치안판사에게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기도 하고 눈보라 치는 겨울이 되자 움집을 짓고 그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오죽하면 사형수에게 교수형보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겪게 하는 것이 더 큰 형벌일 것이라고 말했을까.
이런 과정을 거쳐 배경이 완성된 후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오필리아의 모습을 그리는데 모델은 당시 화가들의 뮤즈였던 엘리자베스 시달. 그녀에게 은빛 드레스를 입히고 욕조에 눕게 한 후 물에 빠진 오필리아를 묘사했다. 때는 한 겨울 이었고 욕조에 담긴 물을 지속적으로 데워주는 램프를 켜놓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램프가 꺼지는 바람에 물은 삽시간에 식어버리고 시달은 몰입하고 있는 밀레이를 중지시킬 수없어 찬 물에 한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이로 인해 시달은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눕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시달의 아버지가 극노하여 밀레이에게 치료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에는 셰익스피어의 원문에서 언급되거나 상징적인 의미의 여러 종류의 꽃과 식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인물 묘사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오필리아의 목에 두른 제비꽃 목걸이는 '충절'을 그녀에게 향해있는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오른손 주변의 데이지는 '순수'를, 오필리아의 뺨과 드레스 옆의 장미는 '젊음'을, 팬지는 '헛된 사랑'을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한다. 밀레이가 그린 식물과 꽃들은 당시의 자연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정교한 연구로 여겨졌다. 후일 밀레이의 아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한 식물학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꽃이 핀 자연으로 나가는 대신 그림을 보며 수업을 하기도 했단다.
다시 한번 <오필리아>를 본다. 비참한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로워 보인다. 물과 진흙은 끝내 그녀를 삼켜버리겠지만 이마저도 포근한 연인의 품속인 양 자신을 온전하게 내맡기고 있는 오필리아.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래가 새어 나오고, 이제는 곧 끝나게 될 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흐린 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기에 죽음의 직전이 되어서야 평안을 느끼고 있는가? 아름다운 여인, 화려한 드레스, 만개한 꽃과 생생한 식물 등 살아있음의 상징들을 동원에 죽음을 그려내서일까? 죽음을 초월한 숭고의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다.
밀레이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레이를 사랑했고, 결국 결혼했다. 그들은 행복했지만 아내 에피에겐 '불륜녀'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밀레이의 업적에 대한 보답으로 준남작 지위를 하사했는데 남편의 서임식에 에피를 초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둘 사이의 사랑은 더욱 돈독해지고 아이 여덟이 태어나자 더 이상 주류체제에 반기를 들어서는 아내와 자녀를 부양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밀레이는 과거엔 거부했던 왕립미술원의 수장이 되어 많은 왕족과 귀족이 원하는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변절이라는 단어를 붙여 그를 비난했는데 밀레이는 라파엘전파의 동료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찬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 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
아내와 여덟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을 어느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이 더 잘 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