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쿠르베 <상처입은 남자>, <돌 깨는 사람들>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넘쳐 잡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 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은 뜬금없게도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상처 입은 남자, 1844~1845>를 보며 내가 떠올린 곡이다.
남자의 오른 어깨 위로 보이는 칼자루,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선연한 붉은 피, 코트 자락을 잡은 손등에 불쑥 솟아있는 푸른 정맥, 저 멀리 동이 터오기 직전의 미명, 이것들은 이 남자의 어떤 세계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이 그림의 묘한 점은 상처 입은 남자의 표정이다. 고통보다는 안도감과 에로틱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 듯하여 누군가를 향한 애절한 갈망과 모든 것을 끝내버린 편안함이라는 두 개의 메시지가 뒤섞여있는 듯했다. 너무나 오묘한 그의 모습을 한참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 와중에 잘생겼네… 하면서
쿠르베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특이한 것은 과거의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방법인 거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관람자 쪽을 향한 포즈가 아니라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 주인공처럼 연출된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점이다. 쿠르베가 다른 화가들과 달리 눈을 감은 자화상, 절망하는 순간의 표정을 담은 자화상, 손을 들며 허공을 응시하는 자화상 등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중 <상처 입은 남자>라는 제목이 붙은 자화상은 쿠르베의 표정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있었던 작품이다. 도대체 왜 가슴에 칼을 찔린 남자의 표정이 이리도 평온한가에 대한 의구심은 2015년 오르세미술관의 X선 분석에 의해 풀렸다. 그리고 그림 밑에 숨어있던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자비에 루케지 덕분이다. 그는 X선을 활용해 세계적인 명화들을 촬영하고, 이를 통해 2차원적 데이터 안에 숨어있는 수많은 3차원의 입체적 레이어들을 보여준다.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는 현재 그림 아래에 두 개의 오래된 구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로 그려진 그림은 젊은 여성의 스케치로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였고(자비에의 사진 중 노란 선) 두 번째로 그려진 그림은 쿠르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자비에의 사진 중 붉은 선). 이는 브장송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쿠르베의 스케치 <전원에서의 낮잠 La Sieste champêtre >(1840)과 매우 유사한 구성으로, 쿠르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여인은 비르지니 비네로 추정한다. 스케치를 기반으로 보았을 때 <상처 입은 남자>는 원래 연인의 달콤한 한때를 그렸던 그림이었으리라.
열한 살 연상의 비르지니와 10년간 연애를 한 쿠르베는 그녀를 평생의 사랑이라고 여겼지만 1852년 비르지니는 쿠르베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은 끝나고 죽음과도 같은 이별 앞에서 쿠르베는 어떻게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 중 하나는 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이 있기 전 우리는 한 장의 사진 중 반을 차지하고 있는, 심지어 빛나게 웃고 있는 그 사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찢었던가. 물론 이렇게 찢긴 사진은 항상 드라마에서 과거 사건의 실마리가 되어 주인공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쿠르베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떠난 여인, 그녀와의 달콤한 시간은 사라졌다. 쿠르베는 그녀의 모습은 어두운 색 물감으로 지워버렸고 자신의 얼굴에는 수염을 그려 넣어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얼굴에 표현했다. 왼손의 위치를 바꾸고 칼과 피의 얼룩을 추가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난, 괜찮아… '라고 애써 말하듯 자신의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쿠르베는 이 그림을 오랫동안 간직했다. 말년에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을 하는 상황에서도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쿠르베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화가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미술사에서 기억하는 쿠르베는 동시대 화가들 중 가장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다. 물론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쿠르베가 활동하던 시기, 프랑스는 몇 번의 혁명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꾀했음에도 여전히 소수의 지주층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민중의 선거권 확대 요구가 거절당하자 프랑스 전역은 다시 혁명의 기운으로 물들게 된다. 이때 파리의 지식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한 사상과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제도권 미술을 지배하던 사조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였다. 신고전주의는 과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로서의 회귀를 주창하며 고전적이고 역사적 내용, 애국심이나 영웅적 모습등을 아카데미즘적 방법으로 그렸다. 신고전주의의 대척점에서 반목하였던 낭만주의는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시하며 자유롭고 격정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쿠르베는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가 그려내는 세상이 실제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신화 속 호라티우스 형제나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따윈 지금 사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선무인, 병과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쿠르베의 이런 예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사회학자 조제프 프루동(Joseph Proudonhn)이었다.
최초로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로 칭했던 푸루동은 모든 유형의 절대적 힘 즉, 교회나 독재와 같은 권위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다. 어떤 경우라도 공공의 이익,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은 공권력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적인 지배와 통치가 사라진 사회만이 진정한 조화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며 예술이란 사회적 공익성을 담아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루동에게 동조한 쿠르베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허울에 가려진 진짜 주인공인 노동자계층에 관심을 가졌으며 영웅이나 신, 이상적이고 이국적인 곳의 이야기 대신 '지금', '여기'를 어떤 왜곡이나 미화 없이 그려내고자 했다. 인간 개인의 존엄과 자유, 평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생각에서 출발한 작품이 <돌 깨는 사람들, 1849>이다.
지금의 우리의 관점으로 보아도 어떤 아름다움이나 감동, 충격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은 '추함의 극치'라는 오명을 얻으며 욕을 먹었다. 사회의 숨겨진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은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로 직면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돌을 깨는 노동자들은 이상적인 외모와 신체를 가지지도 않았다. 사회적으로 어떤 권위도 가지지 못한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일 뿐이다. 과거에는 결코 예술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사람들. 이러다 보니 그는 국가의 후원은 고사하고 아카데미와 지배계층의 취향과 맞서게 된다. 더불어 프랑스 정치사의 격량 속에서 과격한 정치 운동가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모두가 외면하며 직시하지 않던 것들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19세기 회화의 혁신을 견인한 쿠르베를 혁명적인 예술가라 하지 않는다면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
<돌 깨는 사람들>은 1945년까지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 소장 중이던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안전한 보관소로 옮기던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