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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Sep 20. 2024

너무 짧은 찬란함

신이 주신 선물, 라파엘로 산치오

KBS가 2020년 추석에 기획한 코로나19 극복 특집 나훈아  콘서트는 그의 15년 만의 TV 출연이라는 점에서 중장년층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날 방송된 신곡 하나가 예상치 못하게 젊은 층에도 어필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라는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테스형'이 누구일지 궁금해했고 바로 이어지는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이라는 가사 말에 모두 아하! 하고 웃음 지었다. 그날,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저 세상에서 갑자기 쏟아진  팬레터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K-pop 스타라도 됐나”하고 말이다. 왜 나훈아는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2600년 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묻고자 했을까? 나훈아뿐인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또한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애플을 넘겨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경외심은 비단 소크라테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자신보다 250년 전에 활동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집요하게 재해석한 작품 수십 점을 남겼고 도미니크 앵그르는 자신보다 350년 앞서 살았던 선배 예술가 라파엘로 산치오와 그의 뮤즈 마르게리타를 주인공으로 한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라는 제목의 작품을  여섯 점이나 그리며 그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했다. 잡스, 피카소, 앵그르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들의 창조적 여정에는 모두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과의 지적 대화가 있었다.   


왼쪽: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라> 앵그르  1813-1814 / 오른쪽: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라> 앵그르 1827

                                                                                               

왼쪽: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라> 앵그르 1840  / 오른쪽: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라> 앵그르 연도 미상


앵그르는 평생 동경해 온 라파엘로를 이상적인 예술가로 여기며, 그의 삶과 작품을 심도 있게 탐구한 끝에 1814년부터 1840년까지 라파엘로와 그의 뮤즈였던 마르게리타 루티의 모습을 담은 <라파엘로와 라 포르리나>를 여섯 차례나 화폭에 담아냈다. 마치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라파엘로와 직접 마주한 듯, 그의 예술에 대한 경외심을 붓 끝에 실어 표현한 것이다. 이는 마치 칸초네 가수 루치오 달라가 전설적 테너 엔리코 카루소를 기리며 만든 노래 <카루소>, 미국 가수 돈 맥클린이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노래한 <Vincent>와도 같다. 앵그르 또한 붓을 통해 라파엘로에게 바치는 ‘시각적 헌정곡’을 완성한 셈이다. 앵그르뿐만이 아니다.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등 수많은 후대의 화가들이 라파엘로의 완벽한 비례, 균형, 조화, 인간미, 종교적 영감을 자신들의 작품에 녹여내며 선배 화가의 향한 경외심을 붓으로 찬양했다.


‘완벽한’ 예술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는 이탈리아 우르비노 출신이다. ‘완벽’이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고, 부족하거나 결함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것이나 사람이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최고 수준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이 단어를 라파엘로에게 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 그리고 예술 평론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하늘은 예술을 정복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이 세상에 보냈지만, 예술뿐 아니라 예절도 다스리기 위해 라파엘로를 세상에 내보냈다. 라파엘로는 과거 예술가들과 달리 인간 정신의 갖가지 미덕, 즉 예의, 근면, 우미, 겸손,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 만한 착한 성품을 간직했다."라고 말하며 성격이 괴팍했던 미켈란젤로에 비해 인간성까지 겸비한 라파엘로의 예술성을 찬미했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라고 말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보다 한 수 위의 예술가로 평가했다. 누군가 라파엘로를 '책임감 있는 다 빈치, 욱하지 않는 미켈란젤로'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는데 꽤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에 풋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르네상스의 거장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두 거장으로부터 배우고, 그 둘의 단점을 보완한 완벽한 인물 라파엘로 산치오, 우리에겐 두 거장에 비해 다소 덜 알려진 라파엘로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인싸 중에서도 인싸, 셀럽 중에서도 쎌럽인 예술가였다. 


앵그르가 1813-1814년에 그린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에는 라파엘로의 두 걸작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젤 위에는 이제 막 그리기 시작한 마르게리타의 초상, 우리가 오늘날 <라 포르나리나>라 부르는 그림이 있고, 뒷벽에는 <의자에 앉은 성모>(1513)가 세워져 있다. 앵그르가 이 두 작품을 하나의 화면에 담은 것은 라파엘로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두 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낸다. 순수한 성모의 형상과 육체적 열정이 깃든 여인의 모습이 모두 마르게리타를 통해 구현되었기에, 라파엘로는 그녀 안에서 신성의 고귀함과 인간의 관능미를 동시에 보았다. 그러므로 마르게리타는 그에게 단순한 연인을 넘어, 그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대공의 성모> (Madonna del Granduca), 라파엘로 산치오,  1504~1505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자상은 미술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언뜻 보면 뭐가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그가 그린 성모는 그 이전의 성모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시 대부분의 성모상은 신성을 강조하며 고통이나 인간적인 감정은 배제된 초월적인 존재로 그렸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이 신성에 인간 어머니로서의 따스함과 섬세한 감정을 더해, 신성과 인간성의 완벽한 균형을 이뤄냈다. 그의 성모는 경건하면서도 자애롭고, 고귀하면서도 다정하다. 이로 인해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특별한 감동을 주었으며, 그가 만들어낸 이 새로운 조화는 이후 모든 성모자상의 원형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이 특별해보지 않는 이유다. 그 익숙함 때문에 우리는 라파엘로가 이룩한 위대한 혁신을 종종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뿐만이 아니다. 라파엘로의 붓을 통하면 아름다움은 천상의 것이 되었다.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와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그의 작품을 찬양하며 의뢰를 멈추지 않았다. 수려한 외모, 부드럽고 우아하며 신성한 은총을 타고난 인물,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예술가였다.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말했다. 어디를 가든지 귀족 가문들의 여인들이 그를 만나려고 애썼고, 그에게 작업을 의뢰하거나 초상화를 요청하며 그의 작업실에 몰려들었다. 라파엘로 또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런 성향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부드러운 감성과 아름다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많은 여인들 중 라파엘로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마르게리타 루티(La Fornarina)였다. 가난한 제빵사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는 그 매혹적인 눈빛과 우아한 미소로 라파엘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외모만으로 그를 끌어당긴 것이 아니었다. 마르게리타는 라파엘로에게 예술적 이상과 인간적 열정을 동시에 제공한 존재였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에게 사랑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게 했고, 그녀를 통해 그는 작품 속에서 육체적 열정과 숭고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라파엘로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라파엘로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교황청과의 연결을 통해 더 큰 권력과 성공을 누릴 기회가 생겨났고 그 기회는 베르나르도 다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 마리아 비비에나와의 약혼이었다. 이 약혼은 단순한 개인적 결합을 넘어, 라파엘로에게 사회적 명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베르나르도 추기경은 메디치 가문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레오 10세의 신임을 받는 중요한 인물로, 교황청의 재정 관리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압박 속에서 라파엘로는 추기경의 약혼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라파엘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비비에나와의 결혼을 미루며 마르게리타와 비밀스러운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약혼녀였던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와의 약혼 상태로 6년을 보냈으나, 끝내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그 사이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이어갔고, 비비에나는 라파엘로보다 앞서 사망하였고 라파엘로도 152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두 여인과 얽힌 그의 복잡한 삶의 이야기도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마르게리타를 모델로 한 작품 <라 포르나리나> 속 마르게리타는 비너스의 포즈라고 불리는 '비너스 푸디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푸디카'는 '수줍은' 또는 '순수한'이라는 뜻으로 ‘비너스 푸디카’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서 미의 여신 비너스가 한 손으론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론 음부를 가린 포즈를 말한다. 라파엘로는 '라 포르나리나' 속 마르게리타를 여신이 가진 신성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분위기의 여성으로 그렸다. 그녀의 표정은 정숙한 것 같으면서도 도발적이고 도도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스럽다. 아주 섬세한 터치로 투명하고 매끄러운 피부와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표현했다.


왼쪽: 비너스 푸디카의 전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메디치 비너스>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 사이 제작 / 오른쪽 :  <라 포르나리나> 라파엘로 산치오,  1518~1520


머리엔 당시 로마 귀부인들의 머리장식인 터번을, 그녀의 팔뚝에 팔찌를 둘렀다. 그 팔찌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사랑의 서약이었을까?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마르게리타의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나 누군가에 의해 덧칠된 상태로 480년간 숨겨져 있었다. 2001년도 그림의 복원을 위해 실시된 엑스레이 분석에서 반지의 존재가 밝혀졌다. 누가 왜 반지를 지워버린 걸까? 


라파엘로는 안타깝게도 3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데, 라파엘로의 사인으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열병,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 그중 라파엘로와 동시대에 살았던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책 ‘예술가 열전’에서 라파엘로의 사인을 마르게리타와의 열정적인 애정행각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말 대로라면 교황의 공식적 후원을 등에 업고 추기경의 조카와 약혼을 한 최고의 엘리트 화가가 가난한 빵집 딸과 몰래 연애를 하다 죽었으니 그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녀를 그린 초상화에 라파엘로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와 반지는 요즘말로 빼박 증거였을 테니 라파엘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의 제자들은 비밀스러운 그들의 관계가 들통나 스승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 반지를 덧칠로 없앴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모두 후대의 추측일 뿐이다. 


라파엘로의 짧은 생애는 르네상스 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만약에'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가 더 오래 살아 원숙한 시기의 작품을 남겼다면 미술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영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라파엘로의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표본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예술가들과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다시 라파엘로가 스물다섯이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20대의 이른 나이에 로마 교황청 소속의 화가가 된다. 교황이 거주하는 관저인 사도궁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교황의 개인서재였던 '서명의 방'을 장식하는 일을 다른 화가들과 함께 맡게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라파엘로는 교황을 감동시켰고, 교황은 다른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을 모두 긁어내라고 명령한 후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방을 가득 채우게 한다. 네 개의 벽에는 각각 철학, 문학, 신학, 법을 주제로 한 작품이 그려졌고 이 중 철학을 주제로 한 벽화가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학자 21명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라파엘로가 승승장구하던 시기 사도궁전의 경당인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라파엘로는 비밀리에 작업하던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게 되었다. 그는 놀랐다. 그리고 큰 영감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힘 있고 드라마틱한 인물 표현에 감탄한 라파엘로는 자신의 작업에도 그런 특징을 반영하려 노력한다. 여기에 바로 라파엘로의 최대 장점이 있다. 자신의 방법만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라파엘로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하면 배척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미 눈부신 재능을 가진 라파엘로였지만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은 라파엘로가 아테네학당을 그리기 전에 만든 스케치를 소장하고 있다. 스케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벽화에 반영되었지만 스케치에 없는 인물이 한 명 등장하는데 벽화 중앙 계단에 앉아있는 헤라클레이토스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구도 상 동떨어져 보이고 원근법도 약간 어긋나 보인다. 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그려졌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함께인 반면 혼자 앉아 사색에 담긴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고독한 작업 스타일과 내면의 깊은 사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듯하다.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고 난 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최후에 추가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아테네 학당의 중앙에 서 있는 두 명중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은 천상의 이데아를 지향했던 플라톤으로 그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테네학당의 스케치
아테네학당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경쟁하기도 했지만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에게 라파엘로는 그저 겉멋이 가득 든 애송이 샌님, 외모 하나 믿고 까부는 버릇없는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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