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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Oct 06. 2024

새드앤딩이 주는 위로

라파엘전파와 중세주의

언젠가 로맨틱 코미디 한 편을 보고 영화관을 나서며 친구가 물었다.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어느 쪽이 더 좋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행복한 결말은 분명 따스함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 깊이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새드엔딩의 아릿한 슬픔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인생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비극적 결말은 슬픔을 넘어 숭고함을 느끼게 했고, 27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장면이 생생한 <타이타닉>의 슬픈 사랑은 여전히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최근 본 <헤어질 결심>의 여운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닷가 장면, 그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파도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 세 작품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깊은 여운을 남겼는데 이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 슬픔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탑 계단에서의 만남, 프레데릭 윌리엄 버튼, 1864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슬픔, 그런 감정을 떠올리게 한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그림을 처음 보았을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새드엔딩을 예고하는 영화의 포스터처럼, 슬픈 이야기가 그림 아래서 꿈틀대며 한참 동안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남녀가 슬로모션처럼 스쳐 지나는 순간의 한 토막을 잘라내어 영원의 틀 속에 가둔듯한 장면은 ‘슬퍼서 아름답다’는 역설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림 속 모든 요소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슬픈 운명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단 하나의 선조차 허투루 그려지지 않았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비극이 가지는 숭고함을 완벽히 구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바로 프레데릭 윌리엄 버튼(Sir Frederic William Burton, 1816–1900)의 작품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탑 계단에서의 만남>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 중 하나다.


헬레릴은 성주의 딸이고, 힐데브란트는 그녀를 보호하던 호위무사 중 한 명이다. 신분 차이를 넘어서 사랑하게 된 두 사람, 그러나 헬레릴과 힐데브란트의 사랑은 운명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헬레릴의 아버지가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분노에 휩싸였고, 힐데브란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림 속 장면은 헬레릴과 힐데브란트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다. 힐데브란트는 헬레릴의 팔을 붙들며, 무력한 절망 속에서 입을 맞춘다. 하지만 헬레릴은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눈물만 흘린다. 힐데브란트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헬레릴의 눈앞에서 그녀의 남자 형제 일곱이 힐데브란트를 죽이기 위해 칼을 뽑았다. 힐데브란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헬레릴의 형제 여섯을 쓰러뜨린다. 힐데브란트가 마지막 남은 막내 동생을 향해 칼을 겨누었을 때, 헬레릴은 절박하게 외친다. "제발, 막내만큼은 살려줘!" 힐데브란트는 그녀의 목소리에 망설였고, 그 순간 막내 동생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힐데브란트의 흐릿한 시야에 절망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헬레릴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가? 이런 결과를 이미 예측했다면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사문학의 전형적인 클리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이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신분이나 의무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패턴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켈트족의 옛 전설을 소재로 하여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이야기로 만들어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도 대표적인 기사문학으로 이 전형적인 구조를 따른다.


트리스탄은 콘월의 왕 마르크의 충직한 기사이자 혈육, 그에게 있어 왕의 명령은 곧 운명이었다. 왕은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공주, 이졸데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트리스탄에게 내린다. 이졸데를 콘월로 안전하게 데려가야 할 임무를 맡은 트리스탄은 그만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거센 파도처럼 다가온 운명의 장난은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콘월에 도착하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헤어져야 할 운명, 그러느니 함께 죽기로 하고 독약을 마신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것은 독약이 아니라 사랑의 묘약이었다. 결국 그들은 거스를 수 없는 깊은 사랑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사랑의 슬픈 결말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졸데는 마르크 왕의 신부로서 왕의 곁에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트리스탄의 것이었다.  

                                                   

노래의 끝(트리스탄과 이졸데), 에드먼드 레이튼(Edmund Leighton , 1852–1922), 1902


  왕의 눈을 피해 몰래 이어가던 이들의 사랑은, 결국 발각된다. 트리스탄은 왕국에서 추방당하고, 세상 끝으로 내몰린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여인과 결혼하는데, 이유는 단지 그녀의 이름이 이졸데(흰 손의 이졸데라 부른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오로지 운명의 여인인 이졸데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트리스탄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 "이졸데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라며 친구에게 이졸데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오는 배에 깃발을 달되 그녀와 함께라면 흰 깃발을, 그렇지 않다면 검은 깃발을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엿들은 흰 손의 이졸데는 검은 깃발이 달린 배가 보인다고 트리스탄에게 거짓말을 한다. 트리스탄의 한 가닥 희망은 스러지고 절망과 그리움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며 숨을 거둔다. 그가 세상을 떠난 그 순간, 바다 너머 흰 돛을 단 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곁으로 달려와 이미 차가워진 그의 몸을 끌어안고, 그리움과 슬픔에 찢긴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중세 기사문학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묘약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강렬한 감정을 상징해 왔다. 이는 불가능하거나 금지된 사랑을 성취하게 하는 도구로, 운명적인 사랑의 비극적 혹은 희극적 전개를 촉진한다.



물약을 든 트리스탄과 이졸데,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1916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이 비극적 사랑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잔에 담긴 독약을 마시기 직전의 상황을 단순히 인물이나 장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 속에 심오한 상징물들을 배치하여 더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작품속 상징물들은 그림의 표면 아래에 숨겨진 내면적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저 멀리 콘월 성이 보이고, 갑옷을 입은 트리스탄은 우아한 망토를 두른 이졸데와 함께 황금빛 잔을 꼭 맞잡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 사랑을 위해 선택한 죽음을 성사시켜 줄 독약을 마시기 직전이다. 트리스탄의 얼굴은 깊은 그늘에 잠겨 있고, 이졸데는 절박하면서도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졸데의 옆에는 그녀가 곧 앉아야 할 왕비의 자리를 상징하는 의자가 놓여있다. 트리스탄의 왼발 아래 갈라진 갑판은 사랑과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내면적 상태를 상징하며 독약 아니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 순간 선을 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곧 충성을 다해야 할 마르크 왕을 배신하게 될 운명에 놓여 있다.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탑 계단에서의 만남>과 <물약을 든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 두 개의 작품이 담고 있는 중세주의 도상은 역사적 정확성에 근거한 것이 아닌 19세기 화가들의 낭만적 상상력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중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들은 영국의 라파엘전(前)파(Pre-Raphaelite Brotherhood)로 그들은 중세시대를 로맨틱하고 신비로운 시대로 재해석하며 당시의 복식, 건축, 풍경 등을 자신들의 미적 기준에 맞게 재창조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 윌리엄 홀만 헌트(1827~1910),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가 주축이된 라파엘전파의 해석은 이후 영화, 문학, 대중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떠올리는 '중세'의 모습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파엘 전파의 중세 도상학적 이미지와 낭만적 미학은 현대 판타지 문학과 영화, 게임산업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잘 드러난다.  톨킨의 작품 속 엘프와 고대 신화적 요소, 루이스의 나니아 세계에서 신비로운 생명체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장면들은 라파엘 전파가 강조했던 자연의 순수성과 신비로움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엘더 스크롤, 어쌔신 크리드, 다크 소울 등 게임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중세 판타지와 영웅서사의 시각적 도상들 또한 라파엘전파의 미학이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탑 계단에서의 만남>을 그린 프레데릭 윌리엄 버튼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라파엘 전파의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발히 활동하며,  라파엘 전파가 추구한 중세적 미학과 이상주의적 서사에 공감하여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라파엘 전파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기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Revival)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들의 이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들이 다루는 비극적 서사가 단순히 고통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슬픔 속에 감춰진 숭고함과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비로소 왜 새드엔딩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는지를 깨달았다. 슬픔의 심연에는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상실과 실패, 절망뿐만 아니라, 사랑과 희생, 그리고 끝없는 열망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깊은 울림이다. 이러한 슬픔 속에서 우리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본다. 그 정신은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고,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한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 슬픔은 단지 어둠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그 속에 깃든 숭고한 힘을 드러내는 거울인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그에 부합하지 않는 분노, 슬픔, 상실 같은 감정들은 회피해야 할 오류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인생이란 기쁨과 환희로만 채워질 수 없음을.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여정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인생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는 그 안에 희로애락이 모두 어우러져 있기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를 그린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 제목만으로도 깊은 통찰과 감동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림 속에 담긴 비극적인 이야기들은 우리가 직접 겪어선 안 될, 어쩌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런 비극적 서사를 그린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슬픔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그로부터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예술은 고통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게 하면서도, 그 속에 깃든 인간의 본질과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비극을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통찰과 감정의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고통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삶의 복잡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가 낳은 예술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이 오페라를 작곡하던 당시 바그너는 친구인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제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였다는 것이었다. 오페라 속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자신과 코지마였던 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결말과는 달리, 바그너와 코지마는 24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870년 결혼에 성공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된 1865년에 코지마는 바그너의 딸을 낳았는데 이 딸에게 바그너는 ‘이졸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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