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시달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49년 겨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윌리엄 홀먼 헌트가 스튜디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동료 월터 하웰 데버럴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내가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지 알아?”
그는 깡마른 몸매에 큰 키, 붉은 머리카락과 희고 수척한 얼굴을 가진 모자 가게 점원, 엘리자베스 시달에 대해 이야기했다. 허약한 체질의 그녀가 내뿜는 연약한 분위기가 그들에게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비쳐졌다. 마치 중세 성화 속 성녀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그녀의 모습은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의 순수함과 종교적 영감을 되살리려 했던 라파엘전파의 이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존 에버렛 밀레이 작품 <오필리아>의 모델이 된 후 그녀의 얼굴은 유명해졌다. 시달은 모델일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층민 출신이었지만 그녀는 예술과 시에 조예가 깊었다. 라파엘전파에 우호적인 평론가 존 러스킨이 그녀의 수업료를 대주겠다고 나섰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수백 편의 시를 지어서 바쳤고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결국 그녀는 로세티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고 다른 화가를 위한 모델일은 못하게 하는 로세티 때문에 라파엘전파의 뮤즈에서 오로지 로세티만의 뮤즈가 되었다.
로세티에게 엘리자베스 시달은 로세티가 꿈꾸던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를 구체화할 수 있는 존재였다. 시달과의 관계는 로세티에게 예술적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내적 갈등을 초래했다. 그는 시달을 분명히 사랑했으나, 그 사랑은 현실적 책임과 예술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요구했다. 시달이 알았어야 했던 것은, 불꽃처럼 강렬하게 시작되는 만남은 때로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은밀한 암시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불꽃이 뜨겁게 타오를수록, 그 끝이 비극적일 때가 많다.
시달에 대한 로세티의 사랑은 깊고 강렬했지만, 로세티는 그녀와의 결혼을 계속해서 미루었다. 시달의 한미한 출신과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핑계 삼았다. 그러나 이 주저함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세티는 시달을 예술적 이상으로 바라보면서도 현실에서의 책임을 두려워했으며,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했다.
문제는 시달과의 이런 불안정한 관계가 이어지는 동안, 로세티는 다른 여성들과도 예술적, 감정적 교류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친구인 윌리엄 홀먼 헌트가 여행을 간 사이 그의 약혼녀 애니 밀러와 밀회를 나누는가 하면 매춘부 출신인 패니 콘포스와의 관계로 지인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풍만한 몸매와 활기찬 성격을 지닌 패니 콘포스는 시달과는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로세티는 그녀의 육체적 매력을 예술적으로 포착하는 데 큰 흥미를 느꼈고, 콘포스를 모델로 <입맞춤받은 입술 Bocca Baciata>을 제작했다. 로세티와 콘포스와의 교류는 시달에게 불안을 안겨 주었고, 로세티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게 했다. 로세티는 시달을 사랑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그녀 외에 다른 모델들에게서도 예술적 영감을 찾고 있었다. 로세티는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원하는 금사빠중에서도 금사빠였다.
병약한 시달은 이런 심리적 어려움 속에서도 모델이 아닌 화가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고 1857년 라파엘전파 전시회에 유일한 여성 화가로 참가했다. 또한 미술학교에 등록하며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로세티의 끊이지 않는 바람기에 지친 시달은 그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런던을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셰필드로 갔지만 그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다. 이런 사실들을 안 주변 지인들은 로세티를 비난했고 로세티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서둘러 그녀에게 찾아간다.
10년이라는 약혼기간 끝에 결혼한 시달은 그토록 바라던 임신을 하게 되지만 그 기쁨은 너무 빨리 사그라든다. 아이는 세상을 빛을 보지도 못한채 배 속에서 죽고 말았다. 그녀의 우울증은 깊어졌고 로세티를 향한 불신의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시달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그녀의 우울은 더 깊어져만 갔다. 그럴수록 그녀는 지속적으로 약물에 의존했고, 결국 결혼한지 2년 만에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사인은 아편성 진통제인 로이덤 과다 복용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로세티에게 깊은 상실감과 죄책감을 남겼다.
시달이 죽고 난 뒤 로세티는 시달에 대한 깊은 사랑과 상실감을 담은 작품 <베아타 베아트릭스(축복받은 베아트리체)>를 그린다. 시달의 영혼과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겹쳐놓은 상징적인 작업이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고개를 약간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몰입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는 듯하다. 그녀의 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무력하게 무릎 위에 놓여있고, 어둠과 빛이 뒤섞인 배경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붉은 비둘기의 머리 위의 헤일로는 시달의 죽음을 단순한 육체적 소멸로 보지 않고, 그녀의 영혼이 영적인 상태로 승화되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둘기가 물고 있는 것은 양귀비 꽃으로 시달의 죽음의 원인인 아편을 상징한다.
베아트리체의 뒤편엔 베르길리우스와 단테가 보인다. 베아트리체와 그들 사이에 해시계가 놓여있고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다. 9라는 숫자는 베아트리체와 연관된 숫자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나이가 9살이었고 두 번째 본 나이도 9의 배수인 18살이었다. 단테는 9가 베아트리체와 연관된 신비한 수라고 여겼다. 로세티가 그림 속 해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 또한 베아트리체와 시달을 연결 지어 그녀의 신성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베아타 베아트릭스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로세티의 깊은 사랑과 고통, 그리고 그 경계에서 찾아낸 평온을 담은 작품이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로세티의 예술적 이상을 구현한 뮤즈이자, 그의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그림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지만, 그 얼굴에 담긴 고요한 슬픔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깊이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준다. 이는 로세티의 예술적 영광의 한 부분으로 남았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죄의 흔적이었다. 그녀와의 사랑, 후회, 그리고 죄책감은 그의 예술 속에 영원히 새겨졌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이제 더 이상 한 예술가의 연인이 아닌,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뮤즈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한 남자의 사랑과 후회, 죄책감은 예술로 승화되었다”로 끝을 맺으면 좋으련만, 로세티의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아있다.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혀를 끌끌 찰 내용이지만 새로운 뮤즈의 증장으로 로세티는 다시 한번 예술적 열정을 되찾게 된다. 풍성하고 길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두드러진 광대와 고혹적인 턱선을 지닌 제인 모리스는 로마의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고전적인 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대의 전형적인 미와는 달랐지만 이런 차별성이 로세티의 예술적 이상에 큰 영감을 주었다. 다만 그 둘 사이가 조금은 복잡했던 것은 그녀가 로세티의 동료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였다는 점이다.
1871년, 로세티와 윌리엄 모리스는 켈름스콧 매너라는 시골 저택을 공동으로 임대한다. 그곳에서 로세티는 제인과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모델로 삼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윌리엄 모리스는 친구와 아내의 관계를 모르는 척했거나, 혹은 자신의 예술적 활동에 집중하며 어느 정도 방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세티는 제인을 모델로 삼아 프로세르피나(Prosperine), 아스타르테 시리아카(Astarte Syriaca) 등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시달은 병약했고 고통스럽게 32년의 삶을 살았다. 그녀가 남긴 시 <죽은 사랑>은 그녀가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죽은 사랑을 위해 울지 말아요,
사랑은 진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사랑의 색은 파랑에서 빨강으로,
밝은 빨강에서 다시 파랑으로 변하죠.
사랑은 일찍 죽을 운명을 타고났고,
수의를 두른 채 누워 있어요.
달콤한 상처로 죽었지만,
이제 많은 숨결과 함께 그를 묻어줘야 해요.
꽃 같은 나이에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어떤 만남은 우리 삶에 빛을 비추고, 어떤 만남은 그 빛을 어둠으로 삼켜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 그 만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강렬한 폭풍이 되어 나를 침몰시킬 수도, 잔잔한 바람이 되어 내가 탄 배를 밀어줄 수도 있다. 기대와 두려움 사이에서, 우리는 그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지 못한 채로 첫 발을 내디딘다. 그 예견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혼자일 때 가장 완전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그저 다른 이의 그림자로 머물지 않아야 한다. 사랑의 배신은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자신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시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허울 좋은 말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인생의 딜레마다.
엘리자베스 시달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 인물이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뮤즈 수잔 발라동이다. 그녀는 불우한 환경과 사랑과 상처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아니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모델로 시작한 그녀의 인생은 끝내 화가라는 이름의 자신을 세상에 남겼다. 발라동의 삶은 우리에게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삶의 주체자로 우뚝 서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모든 만남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그 만남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좌절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결국 그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나간다. 모든 만남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군가의 그늘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발견하며 살아가라는 진지한 삶의 조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