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못 하는 사람이 쓰는 영어 공부한 이야기~
유학을 꽤나 오고 싶어 한 주제에 영어공부를 별로 안 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전공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학을 갈지 못 갈지 자신도 없으니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그 결과 뒤늦은 나이에 너무나도 고통받고 있다. 그동안 왜 그렇게 영어공부를 게을리했는지 그 결과 현재 늦은 나이에 얼마나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보통 영어 공부한 이야기는 이미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쓰지 않나 싶지만 못하는 사람의 실패기도 필요하다고 늘 믿는 사람이기에.... 이 글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다들 이른 나이부터 영어공부 열심히 하셨으면 좋겠다. ^^...
1.
사실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걸 굉장히 귀찮아한다. 모국어부터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진짜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돌 지날 무렵부터 옹알이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4살 때 이루어졌다. 나랑 두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돌 전에 입을 떼었다고 하니 정말 동생보다 늦게 말한 셈이다. 엄마 말에 의하면, 당시에 내가 말을 안 해서 걱정을 하긴 했는데 언어장애가 있어 보이진 않았고 일단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고 했다. 턱이랑 손짓으로 의사전달을 다 하고 있어서 입 여는 걸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며.... 하지만 네 살이 되도록 안 하니까 엄마도 좀 다급해져서 유아용 학습지 같은 걸 시켰다고 했다. 선생님이 매주 와서 억지로 말을 시켜대니까 그제야 입을 열었다나. 다행히 입을 연 후에는 곧 잘 따라갔다고는 한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끔 그렇게 귀찮아서 말 늦게 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게 나였을 뿐.^^ 지금은 말하는 데엔 문제가 없다. 이건 초등교육을 전공한 친구가 들을 때마다 비웃는 일화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한국말조차 배우기 싫어했던 것 같다.
이런 게으름은 당연히 영어를 배울 때도 적용되었다. 초등학교-중학교 때까지 따로 영어 사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우리 애는 사교육 안 받아도 잘해요~ 는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은근히 피해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어디서 누가 준 아동용 영어 교구로 기초 단어 같은 걸 외우거나 구몬 수학을 구독하는 김에 구몬 영어를 구독하는 정도였다. 가정형편이 영어 유치원이나 회화 학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고, 강남에서 그런다더라는 풍문만 들으면서 자랐다.
중학교 내신 성적이 상위권이면 외고 입시 같은 걸 준비하면서 다들 입시 영어를 시작하는 편이었는데, 나는 순전히 외국어 배우기 싫다며 성적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외고 입시는 준비도 안 했다. 당시엔 자사고가 거의 없어서 특목고라고는 과학고 아니면 외국어고뿐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과학영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외국어는 배우기 싫으니까 그냥 인문계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모부님은 입시에 대해서 나보다 더 몰랐기 때문에 억지로 시키지도 않으셨다. (나중에 내 영어성적을 보고 동생들은 다 영어 학원에 보내긴 하셨다.) 보습학원이라도 다녔으면 학원에서 뭘 알려주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미술학원, 컴퓨터학원 같은 데만 다녔고, 그 바람에 정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영어만 배웠다. 그 시간 동안 다른 걸 열심히 했으니까 후회는 별로 없는데, 그냥 내 현재의 영어실력을 생각하면 잔잔한 현타를 느낄 뿐이다.
아무튼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이었다. 내 성적표는 흥선대원군이었다. 국영수사과 줄 세워 놓으면 영어만 저 세상이었다. 성적이 비슷한 친구들은 이미 외고 입시반에서 뭐라도 배운 게 있었는데, 나는 많이 늦은 상태였다. 담임 선생님도 나랑 상담할 때면 영어 얘기만 했다. 좀 어떻게 해보라고... 솔직히 영어를 너무 못해서 문과를 갔다. 수학이랑 언어는 문과 기준으로 성적이 잘 나오니까 대충 하면 될 것 같은데 영어 공부는 3년 내 내해도 모자랄 것 같았으니까. 고등학생 때는 부랴부랴 학원도 다녀보고 인강도 듣고 과외도 받아보고 했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은 게 없었다. 영어를 제일 많이 공부하는 데 영어만큼은 죽어도 1등급이 안 나왔다. 생각해보면 수능 볼 때까지도 일반동사랑 be동사 구분도 잘 못했으니 말 다했다. 어찌어찌 다른 과목 성적 덕분에 대학을 온 게 용할 정도다.
2.
내가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건 정작 대학에 온 이후였다. 일단 첫 번째로, 대학에서 배우는 영어는 고등학교 입시 영어와 달라서 꽤 재미를 붙였다. 그리고 어학원 회화반보다 학교에서 국제학부 학생들과 영어 수업 듣는 게 효율이 더 좋았다. 그리고 전공 수업도 순전히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굳이 영어 강의를 찾아들었다. 공부할 땐 욕했는데, 지나고 나서보니 꽤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학생일 때 동네 어린이 영어 공부방에서 보조 교사로 알바를 2년 동안 했는데 그동안 초중학생들에게 시달리느라 중학교 수준의 영문법 책을 달달 외워버린 것이 도움이 되었다. 갑자기 나한테 찾아온 중학생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지금 당장 가르쳐 달라고 해도 술술 설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교과서와 문제집에 나온 문장들을 반강제로 외운 셈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사실 학생들 보다도 나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 분명 to부정사니 뭐니 줄줄이 설명하는 한국식 영어교재였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줄줄 외우다 보니 외려 영어와 문법에 대한 감이 어느 정도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리딩이 전보다는 빨라졌다는 거지 그게 듣기랑 말하기도 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 주제에 꿈은 커서 대학교 3학년 때 호기롭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일단 첫 번째 과업은 토플 80점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토플 고득점을 받아 명문대로 교환학생을 간다는데 나는 일단 외국 땅을 밟아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학 동안 어학원에 돈을 쏟아붓고 스터디니 뭐니 해서 토플 80점을 어찌어찌 넘겼다. 한국 사람들이 다 그렇듯 리딩으로 점수를 딴 거지 나머지 영역은 처참했다. 특히 스피킹은 엉망진창이었고 리스닝도 심각했다. 나는 당시에 수능 영어도 잘 못 알아듣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토플 리스닝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런 처참한 상태로 교환학생은 생뚱맞게 독일로 가게 되었는데 가서 영어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독일인들이 하는 영어는 또 특유의 독일어와 섞인 악센트가 있어서 알아듣기 더 어려웠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죽어도 안 들리던 귀가 그만 트여버렸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우연히 토플 리스닝 파일을 듣게 되었는데 독일에 가기 이전과 달리 너무 잘 들려서 깜짝 놀랐다. 미국 영어가 이렇게 감사한 발음이었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였다.
한 학기를 독일에서 살았다고 하면 다들 독일어를 잘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영어도 개고생을 해서 겨우 배웠는데 고작 1년 배운 언어를 기억할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살면서 제2 외국어는 되게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 고등학교 때엔 제2 외국어 과목으로 일본어를 선택했는데, 단지 불어를 배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2학년 내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웠던 것 같지만 단어를 외워도 계속 까먹어서 동사 변화까지 응용할 겨를이 없었던 터라 내신 성적은 처참했고 고3 때는 결국 한문 반을 선택해 버렸다. 그렇게 일본어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수능 볼 땐 결국 사실상 '언어가 아닌' 한문 과목을 응시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그나마 외웠던 한자도 다 까먹게 된다.) 대학에서도 제2 외국어 과목이 필수 교양이라서 어쩔 수 없이 스페인 어를 택했다. 순전히 스페인 어 교수님이 외고 출신과 현지에서 살다온 사람은 수강 금지를 내걸었기 때문에 학점 경쟁력이 그나마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초급 스페인어 과목이 꽤 재미있어서 중급 스페인어 수업도 들어봤지만 역시나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한다. 독일 교환학생이 확정된 후에는 출국 전 한 학기 정도 기초 독일어 수업을 듣고 독일에서도 외국 학생 대상 독일어 수업을 들었지만 역시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일본어도, 스페인어도, 독일어도 그냥 그런 언어가 지구 상에 존재한다는 흐릿한 기억만 남아있다. 언어를 배우는 일에 영 흥미가 없어서, 굳이 배울 필요가 없으면 도대체 들춰보지를 않는 게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럴 시간에 딴 거 하자는 심보가 너무 커서 어쩔 수가 없었다.
대학원에 와서 다시 영어에 집중했다. 유학 준비를 하려면 토플 100점을 넘어야 했는데, 특히 스피킹 성적은 따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내가 입학사정관이라도 외국인 학생에게 스피킹 점수를 요구할 것 같긴 했기 때문에 할 말은 없었다. 문제는 내 성적이 더럽게 안 올랐다는 거. 교환학생 준비할 때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서 100점을 막 넘긴 성적으로 장렬하게 토플을 끝냈다. 스피킹 점수는 여전히 좋지 않았는데 더 올릴 수가 없어서 그냥 종료했고. (상위권 학교 지원을 포기했단 뜻이다.) GRE도 verbal이랑 writing은 거의 포기했다. 다행히 내 전공은 Quant (수리 영역 같은 거) 성적이 더 중요해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성적은 물론 처참했다.
보통 영어 회화 공부를 하려면 미드를 많이 보라고 하는데, 나는 역시나 흥선대원군이었던 모양이다. 덕질엔 일가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 다 좋아한다는 미드를 별로 안 좋아했다. 그때 오히려 동양 고전물을 덕질하고 있었으니 미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자발적인 영어 공부는 안 했다. 회사 다닐 때엔 오전 전화영어 프로그램에 등록했지만 그건 영어실력을 늘리는 데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3.
이런 영어 실력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되었으니...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
하필 내가 공부하러 오게 된 곳은 미국 안에서도 사투리가 심한 지역으로... 타 지역 네이티브 미국인도 가끔 못 알아먹을 정도로 발음을 뭉개는 곳이었다. 발음 뭉개는 밈으로 TV 쇼에 나갈 지경이었으니 그냥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는 굉장히 국제적인 공간이었고 교수들이나 교직원들도 타 지역에서 온 경우가 많아 학교 안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로컬 사람들을 만나면 진짜 심각하게 못 알아들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빠르게 말하는 How are you도 못 알아들었으니까. 한국에서 배우는 일반적인 미국 영어는 상대적으로 명확한 발음의 동부나 캘리포니아 억양이 많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울고 싶은 심정으로 1년을 일단 보냈다. 1년을 보내니 그럭저럭 귀가 반쯤은 트였고 눈치도 늘었다. ㅋㅋㅋ 처음 보는 사람이 How are you라고 물어봐도 당황하지 않고 내가 기분이 안 좋아도 대충 Good, How are you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야 배웠다. (아임 파인 땡큐 앤유가 아니다.) 다행히 1학년 과정은 내용 습득 후 문제 풀이를 하는 주입식 교육과정이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크게 상관없었다.
2학년 과정이 문제였다. 2학년 과정은 수많은 논문 리딩과 수업 시간 중의 디스커션, 그리고 리포트 작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총체적으로 사달이 났다. 일단 듣는 게 느리니까 (발음이나 억양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더 따라가기 어려웠다. 수업 전에 아무리 준비를 해 가도, 토론하다 보면 내용이 산으로 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나도 내 고막도 길을 잃었다.) 따라가기 어렵고, 토픽을 못 잡으니 말도 제대로 잘 못하고.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participation에서 낮은 점수를 받게 되곤 했다. 클래스의 반이 넘는 중국 학생들도 침묵을 유지했기 때문에 다행히 혼자는 아니었다. 속으론 할 말이 많았지만 자연스럽게 나 역시 과묵한 아시안 학생이 되어버렸다.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리딩도 문제였다. 한국 영어시험은 리딩이 반이니까 리딩은 많이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논문은 또 달랐다. 논문은 모국어로 읽어도 어려울 판에 영어로 읽어야 했으니. 대충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문장 단위로 분석해서 구석구석 비판까지 해야 하느라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다. 문제는 요구되는 리딩의 양도 엄청났다는 것이다. 미국 친구들이 후다다닥 읽어가는 사이에 나는 중국 친구들과 매일 울면서 페이퍼 리딩을 해야 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어로 읽으면 정말 초고속으로 내용에만 집중하면서 읽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쏟아야 하는 건지 서러울 정도였다. 영어가 영 서툰 중국 친구들은 결국 글자보다 숫자가 많은 필드로 빠지기도 하는데, 나는 딱히 그렇지도 않아서 앞으로도 꾸준히 논문 리딩과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1년 정도 이런 학사 과정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논문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진 건 느꼈지만 과제의 양이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체감할 수 없었다. 학기가 끝난 후에 우연히 들여다본 영어 뉴스가 생각보다 이 전보다 빨리 읽혀서 헛고생 한 건 아니구나 싶었을 뿐이다.
모든 게 문제지만 라이팅도 문제였다. 영어로 글 써본 건 토플 라이팅이랑 SOP 밖에 없었던 내가 논문 리뷰를 쓰거나 기말 페이퍼를 쓰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GRE 라이팅은 한국 학원에서 강사가 나보고 몇 년 동안 공부할 거 아니면 그냥 점수 포기하라고 했었다.) 불가능하지만 대학원생은 교수가 시키면 해야 한다. 파파고와 구글 번역과 그 밖의 여러 사이트의 힘도 빌리고 내가 아는 문법도 총동원해서 쓰긴 써 갔다. 그래도 넘을 수 없는 관사의 벽도 있었고, 문법적으로는 맞는 문장이어도 흐름이 안 맞아서 교수가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교수들은 국제 학생들의 와장창 라이팅이 익숙한 듯 틀린 부분을 교정해주긴 했지만 결국 나에게 라이팅 수업 수강을 권고했다. 쪽팔리긴 했지만 이미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어서 디렉터가 나한테 라이팅 수업을 지정하기 전에 이미 라이팅 수업을 신청해놨었다.
이 학교에서 살아남는 것이 확정된 직후, 나는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너무 실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모든 언어 과목을 수강해서 죄다 들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스피킹 성적 때문에 언어 과목 수강이 이미 필수였었지만. 언어 수업은 꽤 열심히 수강했는데, 왜냐면 만약에 박사 학위 취득에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영어 강사라도 하면서 먹고 살 플랜 B를 남몰래 세워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펀딩을 받고 다니긴 하지만 그래도 돈을 아예 안 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죄다 배워서 본전을 뽑자는 심산도 있었다. 추가 등록금을 더 내지 않는 선에서 영어 과목을 꽉꽉 채워 덕분에 매 학기 12학점씩 들었다. (보통 9학점을 듣는다.) 사실 이젠 더 들을 수업은 없는데 그렇다고 내 실력이 딱히 좋아진 것도 아니다. 다행히 학교에서 단기로 열리는 라이팅 워크숍 과정을 많이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이 들어서 본전을 찾고 실력도 키워야 한다고 궁리 중이다.
최대 복병은 말하기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보단 지금은 언어 구사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봤자 초1 수준에서 초4 수준으로 올라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상 대화에서는 사실 내가 외국인이기도 하니 다들 좀 침착하게 감안해가면서 들어주는 경향이 있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다. 일상 대화에서는 문법이 좀 무너진다고 해서 그렇게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나만 부끄러울 뿐.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외국인들의 억양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면대면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영어 구사력으로 면박을 받았던 일은 없다. 나도 사람을 만나면서 점점 더 많은 표현을 배우고,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점점 덜 받게 되었다. 편한 사이이면 이럴 땐 뭐라고 말하냐, 네가 방금 말한 건 무슨 뜻이냐 하고 그냥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뻔뻔하기도 하다. 최근엔 유튜브로 대단한 회화 강좌를 찾아내서 또 열심히 듣고 있다.
문제는 공적인 말하기이다. 다음 학기에 할당받은 수업들(티칭)이 최근 내 인생 가장 큰 고민이다. 학생들 앞에서 말하려면 말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법도 제대로 쓰고 발음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75분이나 영어로 떠들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한국말로도 발표를 그렇게는 못하기 때문에 진짜 피하고 싶다.) 게다가 이 학교의 학부생들은 대부분 네이티브 학생들이다. 키도 작은 아시안 여자가 영어도 못하면 어떤 취급당할지 눈에 선하다. 강의 평가가 시궁창에 처박히지 않으려면 스피킹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한국인 선배는 명문대는 영어도 못하는 외국인에게 티칭 기회를 주지 않는데 여기선 오히려 티칭 경력을 쌓을 수 있으니 좋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나는 교수가 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별로 와 닿지 않는 조언이었다. 물론 대학원 학과장한테도 항의했지만 말만 영어로 하지 내면에 유교사상을 탑재한 북경대 출신 중국인 학과장은 너의 발표 실력을 키울 기회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냥 박사과정생 굴려서 학부생들 등록금 받아먹으려고 일 시키기 위한 개소리다. 하는 수 없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저번 학기에 문제풀이 수업 진행했을 때의 경험을 생각하면 영 자신이 없다. 그냥 달달 외워서 수업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른 전공은 랩실 생활을 하면서 영어 노출 기회가 늘어서 실력이 는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과에 영어 원어민인 사람도 많지 않고 룸메이트도 같은 한국인이다보니 원어민 친구가 있긴 해도 영어를 하루 종일 말할 환경은 아니다. 영어는 아주 천천히 늘고 있긴 하는 것 같은데 학교가 나에게 요구하는 능력치는 언제나 내 수준을 뛰어넘는다.
4.
다른 언어로 공부하다 보니 언어에 내가 갇혔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수식이나 어떤 정치적 현안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지만 입으로 말하는 건 아직도 슬기로운 생활수준이라서 아직도 나 스스로가 좀 답답할 때가 많다. 말로 할 때나 글로 쓸 때나.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되는 지도 의문스럽고, 디테일한 뉘앙스는 포기하기도 했다. 논문 리딩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속상하고 내가 이걸 모국어로 읽었거나, 영어를 더 잘해서 빨리 읽었으면 생산성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늘 한다.
영어 공부를 게을리했던 어린 시절이 후회되긴 하지만 미국에 온 후로 그걸 후회할 겨를은 없었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미국에 떨어진 지금 당장부터 열심히 해서 영어를 잘해야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한국에서 이미 미국 박사 출신인데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 많이 봤었고, 그게 내 미래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지금은 최대한 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모두 이용하고, 나 스스로 영어를 피하지 않고 계속 부딪치려고는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언어를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몇 개국어를 능통하게 하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일단 닥친 상황에서 내 의사를 잘 표현하고 필요한 수준만큼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어딜 가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영어 배운 기록들을 돌이켜보니 결국 닥쳤을 때 필요한 만큼만 공부하려 했었는데 사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요구되는 수준이 차원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나의 1차적인 목표는 제2외국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로서 정확하게 아카데믹 영어를 구사하고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다.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하지만 억양이나 톤까지 무리해서 원어민을 완벽하게 따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또 슬랭이나 내 연구와 상관없는 영문학 소설책에 나오는 모든 문학적 어휘를 다 알고 싶은 욕심도 아직은 없다. 영어 수업 시간에도 결국 미국에서는 각자의 모국어에서 비롯된 악센트를 굳이 버릴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이 들어서 영어를 배우니까 사실 한계도 느끼고, 또 지금은 해봤자 영원히 원어민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는 있으니까. 하지만 이 1차적인 목표만 해도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장 닥친 다음 학기 수업에서 나는 옹알이를 하지 않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박사과정을 마치기 전 까지는 옹알이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내 언어적 능력치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영어에 집중하면 또 한국어에 구멍이 뚫린다. 사실 요즘 나의 언어생활은 0개 국어 같다. 생활 한국어가 아닌 문어체 한국어는 점점 감을 잃어간다. 말할 때 한자 어휘가 생각 안 날 때가 있어서 영어로 먼저 생각하면서 한국어로 번역해야 할 때도 생긴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게 문제다. 브런치로 이렇게 긴 글이라도 한국어로 쓰지 않는 다면 한국 어휘를 점점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모국어도 계속 사용해서 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란 결국 끝이 없는 것 같다. 모국어도, 제2외국어도, 어쩌면 나중에 배워야 할지도 모를 또 다른 외국어도, 결국 영원히 고통받으면서 배워야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