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혁, (주)씨퀄로, 대표, 컴퓨터 하는 예수쟁이
생성 AI 세계는 강의하고 돌아서면 강의안을 고쳐야 할 정도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생성 AI 기술과 서비스가 나온다. 바야흐로 생성 AI, 춘추전국시대의 문이 열렸다!
나는 목사도 신학자도 아니다. 회사 사장이고 프로그래머인 성도이다. 나는 고객과 직원도 섬긴다. 똑똑하고 다양한 요구를 하는 “고갱님”을 만족시키려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고민도 한다. 가끔 “개독교인"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경제가 어려워질 거라고 예상되면 맘에 부담감을 갖고 헤쳐나갈 길을 골몰하기도 한다.
“개독교”가 된 비참한 한국 기독교에 어두운 세력이 있다. 내가 보기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옳지 않고, 교인들을 위하는 것 같지도 않다. 교인들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그런 세력이 있다. “하나님이 원하셔서"라고 말을 하는데,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것 같다. 때로는 나도 대화를 포기한다.
교인이 급감한다. 인구가 줄어든다. 청년을 교회에서 보기가 힘들어진다. 그럼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청년 “고갱님”들을 모실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빤히 교인 감소가 눈에 보인다. 계산 빠른 “젊은것"들은 “햐~ 저거 다 내 헌금으로 살려야 해?”라고 하고 내뺀다. 남은 자가 져야 할 부담은 더 커진다. 이럴 때는 언능 내 빼는 게 상책이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이 미래 한국 기독교를 바꿀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아니"라고. 기술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예배에 기타, 드럼을 사용할 수 있는가로 논란이 일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아무도 그걸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본질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AI가 설교를 하니 목사는 다 죽는다는 걱정은 불필요하다. AI 설교에 죽을 목사면, 지금 목회를 그만하는 게 바람직하다. AI를 잘 사용하는 목사로 인해, 성도의 요구를 묵살하고 독야고집을 하는 목사의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심지어 생성 AI는 반기독교적이라고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괘도 찬송가를 사용하고 빔프로젝트 찬양가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고집과 비슷하다. 처음 컴퓨터와 이메일이 등장했을 때, 666의 도구라고 했었다. 당시에 나 역시 크리스천으로서 계속 컴퓨터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교회가 그렇게 고민하게끔 만들었었다.
생성 AI를 사용하면서 갖는 묵상은 다음과 같다.
생성 AI는 무려 6개월을 공부만 했다. 그 긴 시간, 엄청난 전기료를 써가면서 수련했다. 그런 공부 시간이 있었기에 질문을 하면 답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우리는 긴 투자의 시간을 가졌던가? 교회의 몰락에 대해 깊이 연구했던가? 20대, 30대에 대해 깊이 살폈던가? 대학생들이 왜 수련회 대신 계절학기와 어학연수를 선택하는지 제대로 연구해 보았나? 6개월 학습의 시간, 수련의 시간은 갖지 않고 열매(output)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입력(input)이 중요하다. Garbage In, Garbage Out이다. 뭘 공부했는가가 중요하다. 백인 편향적인 내용을 공부했으면 백인편향의 결과물을 뱉어낸다. 온라인 활동을 엄청 열심히 하는 이단 편향적 내용을 공부했으면 이단 편향적 내용을 뱉어낸다. 아쉽게도 인터넷에는 이단이 작성한 글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크게 효과 없는 노방 전도보다, 양질의 온라인 결과물 생산에 힘쓰자는 운동이 아쉽다.
교회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교회의 input이다. 그것이 미래에 output으로 나온다.
AI는 몇 번을 물어봐도 짜증 내지 않고 답한다. 질문을 환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 하면 ‘기도하면 나중에 알게 될 거야’라는 답을 주는 교회는 질문이 환영받지 못하는 교회다. 청년은 그런 교회와 목사, 어른을 떠나, AI와 유튜브에게 믿음을 질문한다. 동성애 ㄷ 자만 나와도 화들짝 놀라고, 분노하는 어른에게 청년들은 자유로운 질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주인님 눈치를 본다. 인간에게 유해한 답은 계속해서 차단당한다. “너 틀렸는데?”라고 말하면 끝도 없이 사과한다. 그리고 다시 고쳐서 답한다. 그러면서 AI는 진화한다. 우린 누구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큰 교회 목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하나님 눈치를 봐야 하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하길 원하실까? 교회도 이제는 수시로 눈치 봐야 한다.
잘 뱉어내지만 사실이 아닌 것이 많다. 그 때문에 AI 답변을 안 믿고 재 검증을 한다. 반복되는 환각(hallucination) 효과에 짜증 난다. 교회에서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실제 삶은 대학입학이 중요하다는 걸 부모와 어른들이 삶으로 보여준다. 돈 많이 벌거나 성공해야, 간증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청년들은 보아왔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최우선이라는 것은 환각이었다. 그런 input을 주면 당연히 output은 뻔하다.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말만 번지르하니 짜증이 난다. 그러니 교회를 떠나게 된다.
수준에 맞게 답 한다. “500자로 줄여줘”라고 하면 긴 글 줄여준다. “초등 6학년 수준으로 대답해 줘”라고 하면 어려운 말 쉽게 풀어 대답한다. “유머를 좀 섞어줘”라고 하면 웃을 만한 이야기를 섞어준다. ‘심오한 하나님 나라를 너희가 어찌 알려고 해?’라는 자세로 장시간, 난해한 교리 강론을 고집하지 않는다. 설교의 내용은 변치 말아야 하겠지만, 본질과 관계없는 형식과 방법은 얼마든 달라져야 한다. 심지어 예배의 형식과 방법도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정리해 본다. AI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상한 이야기 같지만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언행일치의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어떤 질문도 허용하고 토의하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답을 못 주면, 질문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 말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 말문을 막아버리면 떠난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저작권과 윤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 복제와 트랜스 휴먼, 초 인공지능(Technical Singularity)에 대해 토의해야 한다. 복음이 말하고 있는 사회 속에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셋째, 인류에게 주어진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 배척하거나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저 또 하나의 ‘도구’로서 기술을 바라보고 사용해야 한다. 어설프게 기술을 사용하면 안 쓰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제대로 배우고, 알고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