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왜케 좋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현 May 12. 2020

굽히거나 굽히지 않거나

영화 [아부의 왕], 2012 - ☆☆

주인공 '동식'은 흔히 말하는 좀 답답한 스타일이었다. 회사 상무와 등산을 가서 가장 먼저 올라가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내기를 하자, 다른 이들은 적당히 회사 상무가 1등 하도록 지친 연기를 하지만, 그는 마지막 스퍼트를 해서 상무를 제치고 1등 하고 기뻐하는 편이다. 그리고 "상무님이 최선을 다하라고 해서했습니... 다..."하고 말하는 편.


"좀 그냥 숙이면 안 되나?"

"한 번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그러면 죽나?"


이런 대사는 없었지만 이런 말을 들었을 것 같은 캐릭터다. 곧고 바르고 참 열심히라, 회사에는 수석으로 들어갔지만 쾌속 승진은커녕 결국 영업 파트로 쫓겨나버린다. 맞는 말,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영업,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보험 영업이라니. 동식은 살아남기 위해 무림은 아니고 찜질방에서 찜질을 즐기는 아부의 왕 '허고수'를 찾아 아부의 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지 않기로 했다는 점에서 (이게 성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장의 플롯이다. '동식'은 '허고수'도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성장하여 보험왕에 등극한다.


사실 '동식'은 지금 돈이 급하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있다. '동식'의 아버지는 그처럼 청렴결백하기만 하여 만년 교감이었다가 최근에 겨우 교장이 된 캐릭터다. 아부로 보험왕에까지 도달하자 '동식'은 아버지가 자신의 과거의 모습처럼 답답해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혼자만 청렴하고 결백하면 뭐하냐고, 다른 사람들 눈엔 그냥 무능력한 교감이고,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는 알아줄 거 아니냐? 그거면 됐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동식'의 아버지가 그래서 선생이라서 교감까지라도 괜찮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회사였다면 훨씬 더 강한 압박이 들어왔을 테고, 그 신념이라던가 자존심이라던가 하는 게 '먹고사니즘' 앞에서 흔적조차 없이 증발했을 확률이 높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숙이는 게 좋은지, 신념을 지키는 게 좋은지 아직 정답은 모르겠다. 각자가 선택하는 일의 범주라고 생각한다. 


다만, 2012년의 영화 '아부의 왕'에서 '동식'은 자존심을 매일 냉장고에 넣어두고 굽히기를 택하여 보험왕에 등극했지만, 2020년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는 "그런 건 고집이며 객기일 뿐이야"라는 거대 권력 김 회장을 상대로 꿈을 실현시킨다. 박새로이의 "소신에 대가가 필요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은 드라마지만 참... 멋ㅎ지네요 싶었다. 


어떤 글에서 인문학이 뭐냐고 하니까 정혜윤이라는 사람이 "인문학은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겪은 후에, 혹은 저지른 뒤에 너무 부끄럽고 후회되고 고통스러워서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는 이야기예요."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박새로이가 "지금 한 번! 지금만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또! 또! 한 번!"이라고 소리 지를 때 그 말이 번뜩 떠올랐다. 저 대사를 연기하면서 자신이 굽혔던 순간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람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고 믿을 수도 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앞으로 8년 후에는 또 어떤 비현실이 나올지,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그 비현실을 마주할지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로부터 배운다는 말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