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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지 않는 일

생존자로 사는 일

지나가지 않는 일          

  아빠가 돌아가신지 15년 정도가 지났다.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6년 넘게 누워계셨다. 돌아가셨을 때가 70대 초반이었으니 요즘 시대로 보면 너무 젊으셨다. 나한테는 아빠가 정신적 지주 같은 분이셨다. 엄마가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바빠 나를 치워두었을 때 그 빈자리를 채워주셨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내 삶이 여러 가지로 덜 힘들었으리라. 아직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아빠’에 관련된 스토리가 나오면 금방 눈물이 글썽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기도 하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시간이 걸리지만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가족이 자살을 하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의 일이다. 자살은 남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남긴다. 남은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평생 짐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흐려지지 않는다. 조그만 불씨만 있어도 시한폭탄처럼 터진다. 

  동생의 선택도 내가 잘못한건 없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나중에 들었다. 사고 전에도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엄마는 의사가 상담을 권했는데 듣지 않았고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미리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동생이 미국에 살 때는 몇 시간씩 전화로 그 얘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6년 동안 아버지 간병하느라 엄마도 나도 지치고 예민해져서 가끔 다투기도 하고 동생과도 틈이 생기고 대화도 뜸에 졌다.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떠나고 나서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내가 더 잘 챙겼더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하는 죄책감이 떠나지 않는다. 아마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일 것이다.     

  사람이란 미련하게 아픔이나 고통을 겪어보기 전에는 왜 알지 못하는 걸까. 당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섣불리 남의 아픔에 대해서 아는 척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힘든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도. 내가 직접 상실과 같은 고통을 겪어보기 전까지는 남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도 없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내 일이 가장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공감이 가지만 그래도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다.

“그래그래 네 마음 다 알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남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 지나가기는 한다. 그런데 지나가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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