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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라는 방아쇠

오늘 저녁메뉴는 죽음입니다

현빈 주연의 “만추”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나라에서 3번째 리메이크되는 영화이고 중국 여배우 탕웨이가 함께 나와서 개봉 전부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촬영배경이 시애틀이라는 것도 익히 홍보되어 잘 알고 있었다. 애틋한 키스씬에 대한 평가까지. 드디어 영화는 시작되었다.

감옥에 수감 중이던 탕웨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1박2일 외출을 허가 받는다. 지골로인 현빈이 만나던 여자의 남편한테 들켜서 도망을 다니던 중 버스 안에서 그와 탕웨이 둘은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버스는 시애틀로 향한다. 그들이 시애틀에서 버스를 내리고, 시내 전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많은 성격도 아니어서 참아야지 맘먹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왜 이런 거지?’ 

결국은 일행들과 점심 약속은 포기하고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조용히 혼자 집으로 들어왔다. 오후 내내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동생이 죽은 건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내가 왜, 이제 와서 왜 울지?

시애틀은 동생이 살던 곳이었다. 2007년 4월 1일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엔 그를 이해하기보단 원망이 너무 컸다. 나이 드신 엄마를 혼자 두고, 몸이 불편한 자신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엄마를 두고 그냥 휑하니 가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3일장을 치르고 화장을 하고 산에다 골분을 뿌렸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장례를 치르며 속으로 계속 화를 냈다.


신체 장애를 갖고 있던 동생, 그 인생 40여 년이 평탄했던 적 없겠지만 마지막 몇 년은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항상 불편한 동생을 돌보기 위해 따라다녀야 했고, 나는 늘 뒷전이어서 평생에 쌓인 원망때문에 그가 왜 죽었을까 보단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게 했다.     

몇 년 동안 그 일을 외면 한 채로 살았는데 마음 속 상처는 어찌 되었던 풀어야 하나 보다. 모른 척 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의식의 어느 한쪽 구석에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다. 조그만 불똥만 튀어도 뻥 터져버린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이없이. 감정은 바닥을 쳐야 다시 올라 올 수 있다. 나의 감정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그 때는 몰랐다. 동생이 먼저 떠났는데 울고불고 하는 게 맞았다. 가슴 아프고 슬픈 게 정상인데 혼자 장례를 치르느라 정신없고 화가 나서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화만 내느라 슬퍼하지도 않고 울지도 못하고 멍한 채로 그냥 그렇게 보냈다. 그렇게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시애틀을 보는 순간에 폭탄처럼 예고 없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터진 울음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지난 몇 년 동안 괜찮은 척 살아온 시간을 다시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제서야 동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하루 동안 혼자만의 추모제를 치르고 정신을 차렸다. 다시는 같은 문제로 폭발할 일은 없을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울어야 할 일에는 틀림없이 울어야 한다. 충분히 감정이 해소될 만큼. 누군가 안아주고 위로해주면 더 좋은 약이다. 남들 앞에서 잘 울지도 못하고 괜찮은 척하던 내가 바보였던 거다. 누구에게 기댈 수도 있고 안아줄 수도 있는데. 왜 괜히 센 척하고 살았을까?

멋있게 보이지도 않는데, 제기랄. 

‘아, 인생 뭐 있어’ 

어느 연예인 말이 가슴이 저리게 공감이 간다     

요즘은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본다. 힘들 때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감정은 바닥을 쳐야 다시 올라 올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냥 괜찮은 척 억지로 힘내려 애쓰는 것보다 마음을 잘 들여다본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후회인지. 상대방한테 화가 난 건지, 나의 수치심으로 나한테 화가 난 건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조금씩 정리가 되기도 한다. 

 감정 처리가 미숙하면 슬퍼도 화를 내고 섭섭해도 화를 낸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도 화를 낸다. 민망해도 화를 낸다. 

 애도 상담을 공부할 때도 방법은 같다. 상황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 상실을 대면하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폭탄처럼 내 안에 쌓인다. 상담자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오래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감정을, 슬픔을 어떻게 꺼내놓아야 하는지 몰랐다. 남 앞에서 잘 울지도 못했고, 내향적이라 표현도 잘 못하는 편이다.

동생이 먼저 떠나고 나서도 슬퍼하지 못했다. 실컷 울지도 못했다. 부모보다 앞서간 자식의 부고를 하기도 곤란하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혼자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어느 산에 재를 뿌렸다.

삼일동안 동생을 원망하고 화를 냈다. 그리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발인 다음 날 저녁은 예정되어있던 갤러리 개관전 오프닝에 가서 손님을 맞으며 인사를 했다. 미룰 수도 취소 할 수도 없는 행사였다. 그러느라 울지도 못했다. 

그때 풀지 못한 슬픔과 분노는 차곡차곡 내 몸속 어딘가에 쌓여 숨죽이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울어야 할 일에는 충분히 울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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