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슬픔의 시작
번외: 언니에 관하여
어제 오빠가 이야기해서 떠올랐는데, 그때 나는 오빠에게 나에 관해 꽤 많은 얘기를 했었더랬다. 2013년 오빠를 만날 당시 나는 사촌언니의 죽음과 나의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악몽에 종종 시달렸고 이로 인한 기분 나쁜 우울의 파도 위에 놓여 넘실댔었다. 괜찮다가도 불안해지고 회복하다가도 순간 바닥을 치는 감정을 나도 어떻게 하기 힘들었다. 나침반 없이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 위에 놓인 기분이 자주 들었다. 대학 입학 후 나의 자아 찾기 욕구가 내 모든 여행의 시발점이었다면 이 위에 체감 백만 톤이 넘는 기름이 부어졌던 건, 2012년 겨울의 그 날이다. 그날, 1년 남짓 함께 살았고, 6년가량 윗집 아랫집으로 문턱 없이 지냈으며 23년간 나의 좋은 친구였던 언니가 죽었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말도 차마 못 하여본 언니였다. 그녀는 친언니 없는 나에게 가장 친절하고 따뜻한 손윗사람이었고, 평생을 쌍둥이로 지냈다 해도 믿을 만큼 마냥 친근한 사람이었다. 내가 시골 살 땐 언니는 정기적으로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우리 집에 놀러와 함께 논밭을 휘집고 다녔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언니는 10살 때부터 순수 미술을 하며 촉망받던 예술가였다. 같이 살던 초등학교 땐 인사동에 미술재료를 사러 쏘다녔고, 용돈을 모아 특별한 기분으로 파스타와 떡볶이를 사 먹곤 했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새로운 장난감을 사고 새로운 수집품이 생기면 차근차근 나에게 설명해 주던 언니를,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을 하는 언니를 정말 존경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때까지 내내 나의 1순위 장래희망이던 ‘디자이너'를 포기한 것도 언니의 재능에 압도당한 나의 소심한 마음 때문이 컸다. 나는 10살 때부터 하루에 12시간 넘게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하는 언니처럼 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비교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도 그 당시 난 언니를 많이 애정하고 동경했었다. 함께 다니는 화실에 언니의 그림은 항상 칭찬의 대상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예술학교에서도 언니의 재능은 빛이 났다. 나는 '감히'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사람이 나의 언니였다.
그런 언니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내 뺨을 할퀴던 겨울날, 갑작스레 내 곁을 떠났다. 믿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그 누구에게도 장례식에 와달라 말하지 못했었다. 그냥 조용히, 홀로 내 마음을 해결하려 했었고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초고밀도 강철 멘탈인 나는 며칠 만에 슬픔을 떨쳐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 한 해를 겪고 나서 나는 알았다. 슬픔은 그 깊은 우물 안에서 충분히 적셔지고 적셔서 내 몸에 자연스레 스며들지 않는 이상 절대 밀어내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