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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 코치 Sep 16. 2019

인생의 전환점이 된 미국 여행

세계가 이렇게 넓었다니!

  때는 2017년 6월, 취준을 목적으로 무작정 휴학을 했으나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시절에 마침 미국으로 이민 가신 큰 이모께서 나를 초대하셔서 엄마가 몇 년간 모았던 여행자금으로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미국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철없던 나는 팽팽 놀기만 하는 내가 꼴 보기 싫어서 엄마가 잠시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거라곤 생각 못하고 마냥 여행 간다고 좋아서 방방 뛰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미국 관광 비자의 최대 체류 기간 3개월을 꽉꽉 채워서 비행기표를 끊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부풀었겠는가.


  그러나 그 부푼 마음은 미국 땅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입국 심사관들에게 푹 찔려서 땅바닥으로 꺼져버리고 말았다. 여러모로 악명 높은 디트로이트 시티에서 환승을 하는데 입국 심사에서 더듬거리면서 어쭙잖게 대답했다니 나를 가차 없이 세컨더리 룸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삼엄해 보이는 그 방은 다 나같이 겁에 질린 동양계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이모에게 상황을 알리려는데 핸드폰은 사용 금지라고 경고를 받아 도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곧 덩치 큰 무서운 심사관들이 나를 데스크로 부르더니 폰을 압수했고 미국 방문 목적에 대해 물었다. 8년 만에 이모 보려고 왔다니까 이모를 무슨 3개월이냐 보냐고 비꼬고 또 미국인 남자 친구나 약혼자의 여부 등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나를 잠재적 불법 체류자나 결혼 준비로 들어오는 예비 신부쯤으로 의심했던 것 같다.

  심사관 중 한 명이 사진첩에 있는 내 졸업 사진을 보고 혹시 모델이고 미국에 일하러 왔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대체 어떻게 모델이겠냐고 그거 다 포토샵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국 심사 때는 그냥 닥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최고라고 어디서 주워 들었기에 그냥 학생이라고 했다. 졸업도 아직 안 했는데 졸업사진은 왜 찍었냐 아주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따지는데 영어가 부족해서 설명이 안되니까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아니 한국 대학 문화가 원래 그런 걸 어쩌라고???

  그 뒤엔 메일함까지 싹 다 뒤지고(다행히 여행 관련 프로모션 메일뿐이었다.)이젠 이모와 대화한 걸 내놓으랜다. 나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보여줬고 그들은 구글 번역기를 써서 대화 하나하나 번역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대화 중에 문제가 될만한 게 있었는지 잽싸게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기억나는 게 없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사관이 아하!! 소리를 지르더니 몇 달간 쫒던 범인을 잡은 형사처럼 기세 등등하게 폰을 들이밀어 보였다.

  뭔가 싶어 보니까 이모가 미국 온 김에 여기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신걸 내가 긍정적으로 대답한 게 이들 딴에는 입국을 거부시킬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급당황해서 이건 그냥 친척 사이에 농담이라고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나를 다 파악했다는 듯 거만한 심사관들의 태도는 한결 더 무례해져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뒤로 계속 모욕적인 언사가 있었지만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계속 여행하러 왔다고만 염불처럼 외웠더니 딱히 더 잡아둘 명분이 없었는지 미국 시민권자인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내가 수화물로 부쳤던 트렁크까지 열어서 모든 검사를 마친 후에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환승 시간이 길었기에 망정이지 2시간이었으면 다음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


  알고 보니 까다로운 미국 입국 심사를 통과하려면 세세한 여행 계획까지 다 말해야 한단다. 나는 그저 이모 댁에 머물면서 천천히 여행 계획을 세우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독수리 같은 심사관들은 나의 이 물렁함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고 어찌어찌 입국한 게 기적같이 느껴진다. 어쨌거나 덕분에 미국에 발을 닿자마자 바짝 긴장하게 되었고 이 나라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정부터 떨어졌지만 이모가 잘해주셔서 금방 그 충격으로부터 회복했다.


  이렇게 험난하게 들어온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나라 미국에서 처음으로 피부에 와 닿았던 점은, 차 문을 여는데 양 옆에 공간이 많아서 활짝 열어도 되는 것이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함에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유럽 여행을 통해 한국 밖 세계에 대해 눈을 뜨긴 했지만 미국은 스케일이 달랐다. 자본이고 사람들이고 그냥 다 컸다. 이 넓은 대륙이 모두 한 나라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미국이 왜 세계 1위 강대국인지 이해가 갔다.


  가족들은 나를 보내고 나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유롭고 좋았다. 물론 동부의 작은 마을이라 할게 많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여유롭게 지냈다. 이모랑 종종 산책하면서 속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이모가 다니시는 한인 교회 교인분들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아틀랜타나 올랜도 같은 다른 도시를 여행하기도 했다.


  여전히 내 인생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히는 지구 상 하나뿐인 디즈니월드는 들어가면서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꿈처럼 아름답고 거대한 신데렐라 성을 보고 내 안의 동심이 그만 터져버린 것이다. 이때 아마 미국과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모두가 가족이나 연인과 와서 즐길 때 혼자서 꿋꿋이 싱글 라이더를 타면서 무려 14시간 동안 땡볕에서 거의 모든 라이드를 다 타고 그것도 모자라 한 번씩 더 타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체력을 너무 탕진한 나머지 이모집에 돌아가서 며칠을 앓아누웠다. 앞으로 몇 년 간은 디즈니랜드조차 다시 가볼 생각이 안들 정도로 혼을 다해 놀았기에 티끌만큼의 후회도 남아있지 않다.


  이모 댁을 떠나 인디애나 주에 사는 사촌 동생의 집에 머물기 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가스까지 서부 로드 트립을 하기도 했다. 10박 11일을 모든 비용 다 포함해서 100만원에 다녀왔던 나를 가성비의 신이라고 불러야 한다.


  3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쓰면 너무 길어지니 요약하자면 정말이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했던 꿈같은 시간이었고 세상은 넓고 나는 아직 어리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행을 기점으로 철도 좀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뉴욕을 통해 출국하기 전 잠시 들렀던 시카고에서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났었다. 상처뿐인 인연에 잘 풀리진 않았지만 덕분에 외국 친구는커녕 외국인만 만나면 얼어붙었던 내가 영어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서 지금은 미국에서 잠시나마 일하고 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랄까.


  연유야 어쨌든 많은 돈을 들여 미국 여행을 보내 주셨던 엄마와(유럽 여행을 흔쾌히 보내주셨던 작은 이모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미국에 초대해서 한 달 넘게 보살펴주신 큰 이모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미국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다시 돌이켜보는 첫 미국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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