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욕심마저 내려놓게 한 아름다운 시골길 <대구–부산>
서울역에 모인 사람들은 깊어가는 밤 시간에도 어디론가 떼를 지어 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사람 사는 내음이 흠씬 풍기는 그 대열에 슬쩍 끼여 있었다.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시 남구 소재에 있는 작은 마을 용호동을 찾기 위해서였다.
언제인가 부산 국제 영화제 주간에 TV를 보다가 장선우 감독이 만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란 영화의 무대 배경이 되었다는 부산 용호동이라는 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륙도를 동그랗게 안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잔잔한 산골짜기에 노인의 주름살처럼 깊게 파인 주검 같은 집들과 공장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허리의 낡은 공동주택들의 이미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이 땅에서 구경할 수 없었던 깊은 이미지로 날카롭게 각인되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줄달음하는 호기심 속에 찾아본 그곳은 처음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우리네 삶의 깊고 우울한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집성촌이었다.
"문디 자슥아. 와 인자 전화하노? "
부산에 사는 선배의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서로의 반가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그렇게 정겹게 쓰이는 부산 사투리의 원조인 문디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거칠게 다가옴을 느꼈다. 용호동을 내려가기로 작정한 후 해방 후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음성나환자 집성촌에 대한 자료들을 모조리 훑어보았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당시의 음성나환자들에게 남겨진 고통의 흔적들이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깊은 수렁의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둥병에서 비롯된 문디라는 말이 스스럼없는 사이에 자주 쓰이는 일반적 호칭이 되어 버렸으니 그것 자체가 참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마중 나온 지인의 차에 올라 새벽을 가르고 용호동에 올랐다. 용호동은 부산시 남구의 동남쪽 끝에 있는 인구 10만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남구에서 그 넓이가 두 번째로 크고 서쪽으로 대연동, 용당동과 접하고, 나머지 삼면은 해안에 접해 있는 지역이다. 새벽에 용호동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으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동네 개들만 요란하게 낯선 방문자를 경계한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날이 샐 때까지 사람들이 떠난 지붕에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가방에서 자료들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 부산시 남구에 소재한 용호동에 만들어진 용호농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나병환자들을 따로 격리하기 위해 만든 음상 나환자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학의 발달로 극소수의 음성 나병환자만이 있을 뿐, 나머지 가구들은 영세가구 공장이나 양계를 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이 떠나간 마을의 폐가를 헐값에 빌려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사람들이 떠난 공가들이 음습한 용호농장의 모습을 만들고 있었고 그런 공가들 사이로 개들이 짖는 집들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었다. 뉴스 기사로 볼 때 내가 찾은 4월의 끝이자 5월의 시작은 공교롭게도 용호동의 마을이 맞이하는 마지막 봄인 셈이었다. 작은 골목에는 조그만 덩어리로 모여있는 유채 꽃만이 용호농장의 마지막 봄을 위해 악착같이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용호동의 이미지를 담았다. 동네엔 작은 개들이 사라질 골목을 아쉬워하며 연신 짖어대고 있었고 높은 산 봉우리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재개발조합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으로 작은 동네는 더욱 축축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용호동은 즐거운 여행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작은 포구, 일상, 그리고 고단한 삶의 대화들이 가꾸어 낸 부산의 작고 외진 어떤 마을일 뿐이다. 거기엔 소외된 역사의 흔적이 있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양계를 하고 가구를 만들면서 삶을 이어온 사람 공동체였다. 이제 용호동은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를 뒤로 하고 근사하고 멋진 바다 풍경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전에 이곳에 있었던 역사를 깔고 앉아 또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난 당신이 나를 생각하듯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느끼는 한 어떤 사람일 뿐이다. 모든 사라지는 사물과 흔적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당신과 내가 바로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