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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바로 써라 핫산 Mar 18. 2022

첫 직장

개발자가 아닌 직장인이 되었다

어쩌다 취업


 한창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2008년 겨울, 모르는 전화번호로 걸려온 합격 통보 전화에 생애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직장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입사 결정을 했다. 평소에 아무 상관이 없던 저 높은 빌딩들을 보며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는 저 중의 한 건물에 내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벅찬 감정이 들었다.


 첫 회사는 한 금융회사의 자회사였다. 뭔가 금융회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과는 다르게 정말 특이한 일들을 했다. 나에게 맡겨진 첫 업무는 고장 난 PC를 봐주거나 PC 사용이 서툰 사람들에게 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회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분위기 파악도 하고 얼굴도 익히라는 의미에서 준 업무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곱게 차려입은 양복으로 이곳저곳 다니며 몸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입고 있던 바지가 종종 찢어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찢어진 바지를 냉큼 손으로 가리고 외투를 벗어 찢어진 부분을 매우 신속하게 가렸다. 주변에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이 키득거리던걸 생각하면... 지금은 바로 반차 각인데 그래도 어찌저찌 수선을 하고 일과를 마쳤다. 그렇게 겨우내, 아니 정확히는 퇴사하는 그날까지도 이런 '막내의 일' 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정말 개발자가 되었을까?


 개발자로서 처음 업무를 맡은 건 아마 봄쯤이었다. 아직 여러 가지로 설익은 신입사원을 쓰기에는 수습을 거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솔루션을 구매해서 사용했고 오픈소스를 쓴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장애에 대한 대응도 우리 손으로 하는 일도 있었지만 제법 외부 업체들의 왕래도 잦았다. 그야말로 거대 고객사인 셈이었다.


 한 번은 그룹사의 보안 솔루션을 도입한다고 각 관계사들의 IT담당 직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갔었다. 커다란 회의실에서 각 솔루션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그 자리가 불편했는지 모른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비교적 젊은 직원들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이어서 그랬는지 뭔가 엉덩이 붙이고 있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날 이후로 외근 같은 것들은 가급적이면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비교적 과거의 버전의 솔루션들은 현재 버전과는 좀 거리가 있는 그런 수준이었다. 만약 버전을 올려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소위 말하는 '책임' 져줄 만한 존재가 아무도 없기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점점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 연못물처럼 보였다. 바로 맞선임에게 이런 내용에 대한 생각을 물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 쳤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배우라고. 그러나 내 이야기는 그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있어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선배들이 야속할 뿐이었다.


 아마 이 무렵쯤에 회사에서 나는 개발자인지를 자꾸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내가 생각하던 개발자였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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