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야기 | 부모와 완전히 독립하는 길
이 글은 브런치북으로 엮기 위해 재업로드한 글입니다.
(원문: https://brunch.co.kr/@hhy134/8)
콩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콩 뿌리에는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고정시키는 박테리아, 일명 ‘뿌리혹박테리아’가 산다. 땅에 질소와 유기물이 많으면 ‘기름지다’고 한다. 유기농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돌려짓기’. 이렇게 콩으로 비옥하게 만든 땅에 짓는 다음해 작물은 잘 된다.
콩 알곡은 ‘노린재’라는 벌레가 좋아한다. 콩 꼬투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어느새 노린재가 날아와 진물을 쪽쪽 빨아먹는다. 그래서 콩깍지 밖에 남지 않는다. 콩 알곡은 없다.
콩은 자랄 때 거의 두 뼘만 남겨놓고, 아예 베어버린다. 이렇게 베어야지 콩이 더 풍성하게, 부케처럼 자란다. 이걸 순치기라고 한다. 콩은 순쳐주지 않으면 키만 크고, 알곡은 조금 밖에 열리지 않는다. 이 정도로 베어버리면 죽지 않을까하는 정도로 베어줘야 한다. 정말 죽을만큼 힘들고 이를 이겨낸 자가 후손을 많이 남긴다는 자연의 이치로 보인다.
올해 우리 콩 순치기는 내가 때를 놓쳤다. 그래서 뒤늦게 급하게 순을 쳤다. 이런 때늦은 모습을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기 전에 다 베어버렸다.
이제 10월 중순, 콩 수확 시기가 다가온다. 마을 밭을 둘러보니 다들 콩밭 상태가 안 좋다. 콩 꼬투리가 다들 홀쭉한 것이, 병인지 노린재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무심코 우리 콩밭을 둘러보는데, 이게 웬걸! 알곡이 너무 실하게 맺혔다. 뒷걸음 치다가 제대로 터트렸다. 비 많고, 일조량이 적은 올해 같은 날씨는 성장 속도가 더디다. 그래서 조금 늦게 순을 치면서 더 실한 알곡을 맺힐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단편이 아니다.
콩밭을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세상 일은 한 면만 볼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
농사를 처음 짓는 분들은 특히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한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나를 키우셨겠구나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농사로 나를 키우지 않으셨다. 우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농사를 업으로 삼으신 분은 없다. 그래서 농사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몸 쓰는 일 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그렇게 평생을 애지 중지 키우셨는데 나는 굳이 여기서 이러고 있네.
부모님, 그 중 이번 편은 아버지.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딸바보다. 여자 셋 밖에 없는 집에서 가장 먼저 ‘사랑해’라고 말을 한 딸바보. 성인이 돼서도 볼뽀뽀는 인사였고, 손 잡기와 포옹은 일상이었다.
근데 너무나 당연한 아버지의 모습이란 생각에, 딸바보란 걸 미처 몰랐다. 다들 알았는데 나만 몰랐다. 주변에서 ‘아빠가 딸을 너무 사랑하네’라고 말을 해줬는데도, 내 귀엔 안 들렸다. 아버지가 계속 껴앉고 도셨는데 내 눈에는 안 보였다.
내 눈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생활비도 안 주고는 ‘나쁜 남편’이었다.
어머니는 피곤한데 회사 다녀 온 아버지는 거실에 누워계시기만 하고, 집안일도 안하고, 당신도 두손두발 다 있으면서 ‘물’이라고 하면 그 누구든 물을 떠다주길 바라고, 손톱발톱도 혼자 잘 못 깎아서 어머니가 깎아줘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었다.
언니가 중학교 때 성적이 안나오면 언니 방에서 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울리던게 뇌리에 박혀있다. 언니가 용인외고에 진학하고 기숙사 생활로 집을 떠나있을 때, 왜 이렇게 시험을 못 보냐고 어머니와 같이 언니 ‘흉’을 보던 모습이 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였나, 내게 아버지는 시험을 봐야지만 사랑해주고, 자랑스러워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성적이 나쁘면 앞에서는 혼내고, 내 뒤에서는 흉을 볼 것 같은, 심하면 딸 취급도 안 해줄 수 있는 것 같은 ‘조건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딸바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아빠의 실체를 모른다고.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 당신은 딸바보다. 그래서 딸이 하는 건 뭐든 같이 하고 싶어했다.
딸들이 유학 가있으면 당신도 한국에서 영어 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딸들에게 영어로 메일을 쓰라고 한다. 그렇게 영어로만 메일을 주고 받았다.
딸이 고등학생이면, 당신은 대학입시를 공부한다. 딸이 공부를 하면, 당신은 대학입시 전략을 짠다. 딸의 성적으로 짤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전략을 짜기 위해 끊임없이 자료수집을 한다. 왠만한 코디네이터보다 더 치밀하게 입시 전략을 짠다. 그래서 딸은 정말 아무 외부적 고민없이 ‘공부’만 하고, ‘성적’만 올리면 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딸이 교환학생을 가고 싶어하면, 당신은 딸 대학교와 결연을 맺은 명문 대학교를 알아본다.
딸이 진로를 고민하면, 당신은 해외 대학원을 알아본다. 로스쿨을 알아본다.
이것이 아버지가 딸을 응원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몰랐다.
사이가 안 좋은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이미 어머니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내게 사랑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답답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만 바라보고 달렸다. 정말 학교-집-학교-집 무한 반복이었다. 친구들과 잘 놀지도 않았다. 대학만 가면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그저 공부만 했다.
무엇보다, 어차피 보낼 시간이라면 학생 때는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딱히 당장 하고 싶은게 없기도 했고, 공부머리는 있었다. 학생 때 일단 공부를 해두면, 나중에 하고 싶은게 생겼을 때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부모님 말에 동의도 했다.
그래서 얌전히 공부했다. 나름 치열하게 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 연세대에 입학했다.
무슨 과를 가고 싶을지 몰라서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싶어 자유전공으로 갔다.
1년이 흘렀지만 전공 탐색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경영경제 학과만 졸업하면 그 이후는 알아서 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경영경제 학과를 졸업하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선택권이 넓어진다고 했다.
약간 세한 느낌.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가면 자유가 있다더니, 막상 대학에 와보니 학과 선택 이후에 자유와 선택권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인생의 ‘자유’는 언제 찾아오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데, 그럼 도대체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철학을 공부하면 이런 인생의 의문이 풀릴까. 철학과 수업을 다수 들었다. 어려운 말, 있어 보이는 말이 그럴듯 했다. 하지만 철학과를 선택하기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경영학과는 아버지가 추천해줬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다. 아버지는 근거 없이 추천 하지 않는다. 고로 아버지가 추천한 경영학과를 선택하면 그 후 내 인생에 대한 ‘보장’도 일부 해주시겠지, 이런 책임전가의 마음으로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3년이 흐르고, 4학년이 되었다. 슬슬 친한 친구들이 동아리보다 학회와 스펙을 쌓는데 집중을 할 때 즈음, 아버지는 로스쿨은 어떤지, 호텔경영 대학원은 어떤지 제안을 하셨다. 그 때 밧줄이 목을 확 죄었다.
아, 이건 애초에 끝날게 아니었구나. 고등학교 때는 대학, 대학 때는 전공, 졸업 때는 진로, 취직하면 결혼, 결혼하면 아이, 아이하면 육아, 육아 하면 어쩌구, 저쩌구. 이러다 노년이 되고 죽는거네. 말 그대로 이러다 죽음.
평생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것인가?
아, 아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를 갈망한다. 나는 남들이 정해주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
짧지만 나는 20여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남들이 말하는 ‘하면 좋다’는 건 다 해보면서 살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실컷 공부했다. 대학생 때는 실컷 놀고 공부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멈추기로 한다. 지금까지로도 충분하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를 손절매하시라고.
부유한 환경에, 넘치는 지원에, 끊임없는 관심을 받았지만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아버지, 저 행자 공부하러 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먹던 포도를 던지고, 손에 있던 태블릿PC도 던졌다.
다음 날 아버지는 비셨다. 내게 3배를 할테니 가지 말라고. 추석만이라고 쇠고 가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지금 가면 부모, 자식과의 연은 여기까지인 줄 알겠다고 하셨다.
네, 잘 알겠습니다.
짐을 싸고 바로 공항으로 갔다.
아버지가 구도자를 이해 못하시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당신의 딸이 구도자, 굳이 그 힘든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셨다. 하지만 내겐 이 길이 쉬운 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버지, 저는 이 진리가 너무 궁금합니다.
나를 자유롭게 할 진리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합니다.
저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간절히, 제 인생을 걸고.
단정적으로 쓴 내용이 많다. 실은 이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더 많은 고민과 고뇌, 패닉과 방황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흔들림은 행자 공부를 하면서도 꽤 지속됐다.
이번 글을 아버지가 읽게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 않을까, 타자가 잘 눌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머뭇거렸다. 위에서 표현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의 왜곡된 시각으로 본 아버지였음을, 내 기억 속 아버지와 실제의 아버지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님을 밝힌다.